어느 겨울밤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침침한 형광등 아래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지식 사냥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그동안 접했던 것과는 뭔가 느낌이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된다. <인문/문화/교양> 편으로 기억한다. '세계 종교와 철학'이란 주제가 등장했고, 아래에는 근엄한 표정의 인물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칸트, 니체, 헤겔 등.
이어서 ‘기독교 핵심 진리는 사랑이요, 불교는 자비’라는 글귀가 등장했다. 그간 마음에 두고 탐닉했던 사랑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훗날 그 의미를 두고 긴 씨름을 하게 될 아가페(Agape) 사랑과 조우한 것이다. 생경하고도 의미심장했지만 더 들어가기엔 내 나이가 어렸고 관심사에서 밀렸다.
온 가족이 바라던 미션스쿨 입학이라는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 동업자의 벼락같은 대문 킥이 날아들었다. 파산이었다. 느닷없이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터널로 진입한 것이다. 가정환경조사 때마다 냉장고, 티브이, 전축 등 모든 항목에 손을 들어 뒤통수가 뜨거웠던 시절은 가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 내눈에는 날벼락 같은 사태의 원인도 해결책도 그리고 그 끝도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인 현실을 벗어나는 길은 2층 서재 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는 일뿐이었다. 그 행위는 현실의 고통을 공상의 나래로 잠시 덮어두는 아편과도 같았다.
그날도 하릴없이 바닥에 누워 김동길 교수의 에세이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습기 올라오는 장판 위에서 암울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가던 중 또 한 번의 의식 전환이 일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시 한 편을 만난 것이다. "사랑이란 완전을 기하는 마음으로 결함을 연민하는 향기입니다"로 기억한다. 뒤통수를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사랑의 본령(本領)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시인들이란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이런 촌철살인의 문장을 만들어내나 질투심마저 올라왔다.
어쩌면 그때 충격과 감동이 지금까지 펜을 붇들게 한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한번 선택했다면 아쉬운 부분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 부분을 연민하며 무한 책임을 지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이지! 머릿속에서는 해질 무렵 누군가를 등에 업고 비틀대며 논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때 나는 사랑을 선택에 대한 무한 책임으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이후로 누가 사랑을 물어오거든 오글거리는 목소리로 그 시를 읊어댔다.
‘비현실적인 사랑에 대한 로망’이라고 하는 대지에 ‘선택에 대한 무한 책임’이라고 하는 난해한 설계도까지 들었으니 사랑의 난공사는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관계라고 하는 벽돌 쌓는 과정도 가볍고 즐거운 유희라기보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동반된 의식에 가까웠으니.
지난하고도 난해한 사랑 공사 과정에 지쳐갈 무렵, 사랑은 그저 삶의 일부이자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수서역 근처 쟁골마을에서 친구와 동거할 무렵이다. 말 그대로 순간적인 현현(懸懸)이었다. 그때 나는 한 권의 책(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멘토(스캇 펙)를 만났고, 그와 번번이 꼬여 풀리지 않던 사랑의 도식을 점검해갔다.
불쾌한 맛을 견디지 못하는 아이의 덜 여문 혀처럼 감미로운 맛만을 고집한 건 아닐까. 미세한 이질감조차 감내하지 못해 삶을 건강하게 해 줄 건강한 맛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구를 기반으로 한 환상과 종교적 강박이 혼합된 배지에서 자라난 이상화(理想化)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고통도 없고 기쁨과 평안함으로 충만한 상태를 함께 만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놓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과 같은 것임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 이상화의 덫으로부터의 구원이 존재하기는 할까 절망스러웠다.
한편으로 지향해야 할 사랑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순간 나를 사로잡는 느낌이나 감정은 사랑의 재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랑 자체는 아니다. 사랑은 명사라기보다는 성장하려는 의지와 훈련이 동반된 지난한 과정, 동사이다. 상대와 나의 성장을 위해 자아를 조금씩 확장해 가는 과정,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걸 방해하는 것은 게으름과 무지 그리고 두려움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랑에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
세월은 비현실적 로망을 향한 방랑의원동력을 앗아갔고,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관념 체계는 종이로 만든 집에 불과했다. 세워졌다고 생각했지만 만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어쩌면 그때라도 속히 머리에서 필드로 훈련장을 이동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