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서 바라본 청초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낭패다. 우산 챙겨 올 걸... 출발 전 현관에서 우산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했던 게 떠올랐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하자!’라고 스스로를 훈계했다.
산책에 미련 남은 강아지처럼 미적대 봤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한 비는 맞고 즐기는 나지만 그 정도가 아니다. 뭣도 약에 쓰려니 없다고, 지근거리에 편의점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에어컨 바람에 보송해진 몸이 한층 더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우산 안 챙긴 걸 한 번 더 자책한 뒤 가방을 둘러메고 뛰기 시작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50여 미터쯤 뛰었을까. 올망졸망한 가게들 사이로 반가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잽싸게 뛰어 들어가 우산 있는지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한쪽 구석에 투명 비닐우산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고 가격을 보니 6,000원이다. 헐.
전 날 인천터미널서 스쳐 지나친 우산이 떠올랐다. 똑같은 제품이었고, 견출지에는 분명 3,00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살까 하다가 현관에 수북이 쌓여 있는 우산이 떠올라 생각을 접었다. 뭐든 잘 못 챙기는 나를 알아서 이기도 했다. 비가 그치면 어딘가에 두고 올 게 뻔했다. 어쨌든 하루 사이에 똑같은 제품을 두 배 가격에 산 셈이다. 씁쓸했지만 더 이상 비를 맞지 않게 된 것에 안도하며 우산을 펼쳤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코너를 하나 돌자 의류 거리가 나왔고, 한 매장 앞에 우산이 진열되어 있었다. 길게 잘 빠진 검은색 장우산이었다. 가격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서 보니 8,000원이었다. 그 위에는 ‘특별 염가 판매’라고 적혀있었다. 방금 전에 산 허술한 비닐우산과 2,000원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속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라왔다. 이거라도 어디냐며 펼친 지 열 걸음도 채 안 되어 비닐우산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는 듯 편의점 간판을 탓하기 시작했다.
‘50미터만 더 뒤에 가 있을 것이지...’
깔끔하게 말아 가지런히 진열된 우산의 고급스러운 자태가 속을 긁었다. 손잡이도 내가 좋아하는 고급스러운 나무 재질이다. 펴봤으니 환불할 수도 없고...
맘속에서는 ‘그냥 하나 더 사!’라는 생각과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는 생각 간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마침 그때 택시 한 대가 정차했고, 작은 비닐우산 하나에 아슬아슬 몸을 숨긴 학생 두 명이 내렸다. 순간 엉뚱하게도 전자에 손을 들어줄 이유가 생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괜찮다고 하면 학생들에게 이 우산을 주고 장우산을 살까?’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마음속에서는 후회와 망설임, 아쉬움의 돌풍이 한바탕 몰아쳤다.
물치항에서 생대구탕집을 하는 지인에게 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깟 우산 하나가 마음속에 몰고 온 감정의 소요에 대해.
장우산이 눈에 들어온 순간 마음속에서는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욕구가 생겨났다. 맘에 드는 멋진 우산을 손에 넣고 싶은 마음과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 하나가 충족되면 나머지 하나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양립 불가능 한 욕구가 동시에 들어설 때 내적 갈등이 일어난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는 욕구 하나가 있었다.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
두 번의 판단 미스와 한 번의 운명의 장난이 가져온 씁쓸한 감정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무마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얻을 만족감이 그것이다.
내적 갈등으로 중심을 잃은 이성은 후회할 게 다분한 길로 나를 유혹했다. 실제로는 8,000원을 더 지출해야 함에도 2,000원만 더 쓰면 된다는 식으로 기만까지 해가며. 까딱하면 지갑에서 총 1,4000원이 나가고 볼 때마다 씁쓸함을 불러올 우산 두 개가 현관을 차지하게 될 터였다.
지인을 만난 뒤 신흥사로 가는 길에 비는 폭우로 변했다. 형편없는 비닐우산은 있으나 마나, 벨트 아래로 흠뻑 젖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신발에서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찰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한 카페에 들어섰다. 황토색 템플 스테이 복장을 한 청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방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곳에 자리를 잡고 쏟아지는 비를 감상했다. 선심교 아래로는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이 거세게 흘렀다. 이름 때문이었을까.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고 있던 나의 혼탁한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현재에 거하지만 현재는 우리 몫이 아니다. 지나버린 과거와 존재할지도 몰랐던 운명의 협공에 허우적대다 현재와 유리된다.
과거는 지울 수 없고 미래는 볼 수 없다. 운명의 신이 쳐 놓았을 그물 역시 거스르기 쉽지 않다. 머리로는 그 걸 알면서도 시간과 운명을 통제 못해 안달하는 게 우리다. 갈등과 괴로움이 숙명인 이유다.
그날 주인공이 나 하나였던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나만 더 보태져도 에피소드는 비극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니까 내 뭐라고 했냐”부터 “멀쩡한 것 놔두고 사긴 왜 사냐”까지. 갈등의 불꽃을 점화시킬 거리들은 많다.
세상에는 강수확률 10%만 돼도 우산을 챙겨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70% 넘어도 강수량 보며 모험을 거는 나 같은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아간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유럽 신혼여행지에서 여권과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대판 싸운 뒤 각자 귀국했다는 사연을 들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갈등을 풀어갔을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 비는 기왕 흠뻑 맞아야 제 맛이었다. 곳곳에 도사린 물웅덩이는 아슬아슬 피해 가야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더 큰 물 폭탄에 도전하는 게임 아이템이었다. 컴컴한 고급 우산보다는 하늘이 훤히 보이고 투닥투닥 내리는 빗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비닐우산이 최고였다. 그 시절을 반면교사 삼으며 설악산을 빠져나왔다.
어쩌면 내리는 비를 털로 겸허히 받아내며 깊은 사색에 잠기고야 마는 야생 동물이 최고수가 아닐까.
결국 하늘이 훤히 보이는 비닐우산은 하루를 못가 고장이 났고, 비는 그쳤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내 생각과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