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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혁 Nov 27. 2022

무책임할 권리

<팩토텀>의 저자 찰스 부코스키 행복론

  만일 당신이 제대로 된 사회 일원이라면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 있을 것이다. 무책임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듣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들을 기회가 좀처럼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심각한 책임과 의무 중독에 빠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익추구와 무한경쟁 두 축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책임'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한 번이라도 찍혔다가는 사회로부터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그 말 듣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혹여라도 PPT자료가 열리지 않을까봐 사전에 메일로 보내고, 동시에 나에게도 보내는 것도 부족해 USB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한 술 더 떠 30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해 제대로 열리는지 점검까지 한 후에야 마음이 놓인다. 책임감 없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구직할 때 면접관에게 가장 먼저 입증해야 할 덕목도 책임감일 것이다. 지급받은 소총이 사라져 패닉에 빠졌던 경험,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 두 번은 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책임감 최고의 국민이 되었다.
 



  명절 때마다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른들의 틀에 박힌 칭찬 때문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용돈을 건네며 주로 하는 말이 “착하게 자라줘서 고맙다”이다. 여자 아이들에겐 얌전하다는 말도 덧붙여진다. 어릴 땐 별생각 없이 듣던 아이들도 머리가 굵어지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고집 세고 별쭝맞은 조카도 그 순간만큼은 착한 표정이 나온다. 착하다거나 얌전하다는 칭찬은 순응적인 아이가 사회에도 잘 적응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착하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누구를 위해 착해야 하고, 말을 예쁘게 하고, 얌전해야 하는 걸까. 우리도 모른 새 사회는 우리를 규범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길러내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일탈이 일상인 루저들의 영웅 '치나스키(부코스키의 페르소나)'가 탄생한다. 더없이 무책임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으면서 거침이 없는.
 



자본주의


   <팩토텀>의 주인공 치나스키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수정자본주의가 들어서던 시대에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주가가 80% 폭락하고 5,000개 넘는 은행이 파산하였으며 실업률이 26%로 치솟았다. 그 결과로 보이지 않는 손(시장)을 불신하며 잘 보이는 손(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과 상품이 쏟아져 나와 실업률 2%대의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던 시기에 발생한 터라 대공황의 충격은 더 컸다. 작품에서 치나스키가 알토란처럼 빼먹던 실업수당도 이때 등장한다.
  
  작품 속 미국 사회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화장실의 페이퍼 핸드 타월,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3회 이상 구직활동을 하는 것 등. 정부 개입 정도를 두고 보수, 진보 양 당이 옥신각신 하며 정권을 주고받는 모습까지도.

   그런데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해도 노동자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알박기를 끝낸 자본가와의 간격은 벌어져만 갔다. 무한경쟁과 물신주의로 인간은 도구가 된 지 오래고, 일용할 양식 떨어지는 게 가장 두려운 노동자들을 고용주는 철저히 관리했다. 관리(management)라는 말도 to handle에서 왔다. 긴 가죽 끈으로 야생마의 목을 묶어 본능을 길들였던 것처럼 기업은 종업원을 관리했다. 작품에서 종업원들에게 매주 지급되는 주급이 노동자의 목줄이다.


  '함께 가족처럼 일할 야망 있는 젊은이 모집'이라는 채용공고는 허울에 불과했고, 업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노동자는 주주에게까지 잉여자본이 흘러들어 가게 하는 파이프에 불과했다.


  그걸 바로 간파한 우리의 치나스키는 자신을 소비해 가면서까지 자본가들에게 협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는데 그 방법이 무책임이다. 그 대가는 컸다. 그레이하운드에 몸을 싣고 미 전역을 떠돌아야 했고, 제목이 말해주듯 온갖 잡일을 다 해야 했다.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봐도 생산 수단을 보유한 자본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치나스키 부모는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낸다. 자본주의 사회의 그럴듯한 지배자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나 학교라고 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자본주의 축소판이었다.



  화려하게 등교하는 스포츠카 주위로 여자아이들이 모였고, 치나스키 주위로는 주류에서 밀려난 아이들이 꾀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삶이 하층부로 밀려난 자들과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걸 숙명으로 받아들인 치나스키는 스스로 소외되어 철저하게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고독이었던 것이다.


  일터에서 완전히 소진되어 돌아온 아버지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냉혹한 세상을 버텨낼 인간을 길러내는 교관에 가까웠다. 지속되는 평가와 학대. 어머니 역시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행복해질 수 있단다”라는 말로 CS(고객만족) 교육에 동참한다. 실직했다는 사실을 감추려 매일 아침 출근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며 치나스키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치나스키군은 모든 것에 반항하죠”
 “어떻게 살아남을 건가요?”
 “모르겠네요 벌써 지쳐서”
 
  -호밀빵 햄 샌드위치-
 


 실존주의
  보편을 강요하는 사회와 본질로부터의 탈출이 실존주의다. 세상은 이미 인간 본질을 탐구하던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실존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관성으로 인해 사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 치나스키는 타인의 욕망 또는 타인의 인정을 욕망하는 삶에서 벗어나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살아감으로써 삶의 주체성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문제는 이러한 실존적 한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는 공허함은 대개 나를 살아가지 못한 자기 상실의 고통이다. 실존보다는 보편적 가치에 맞추어진 삶은 무언가에 예속된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란 진정한 삶을 위한 결단이다.
  
 “신은 인간을 오리지널 하게 만들었는데 무언가를 카피하며 살아가면 그것이 타락이다”
 
  치나스키는 끊임없는 인정투쟁의 장에서 소진되기보다는 선명한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 이로써 그의 정신은 강하고 자유로워진다. 그로 인해 명료해진 눈으로 삶의 실체를 직시했다.
 
 
 비트 세대
  부코스키는 비트 세대다. 사회로부터 아웃사이더로 매정한 대접(beating)을 받던 젊은이들은 술이나, 마약, 질주, 명상 등을 통해 질식할 것 같은 기성 사회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치나스키는 저항은 하되 결코 사회를 떠나지는 안았다. 책 제목처럼 온갖 잡일을 해가며 영웅에 열광하는 이들을 비웃고 하찮고 천박한 것들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대부분 한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단 한 번도 직장을 다니며
 하루 여덟 시간의 노동을 한 적이 없다는 것.
 여덟 시간의 노동보다
 더 현실과 소통하는 길은 없는데도,
 내가 아는 이 시인들은
 대부분 공기만 먹고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게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찰스 부코스키-
 
 마초주의
  작품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데, 미국식 마초주의다. 일반화일 수도 있겠지만, 어지간해서 남자는 우산을 쓰지 않으며 큰 비는 잠시 비켜간다. 스포츠 잘하는 남자에 열광하고, 여학생들은 치어리더가 되기 위해 줄을 선다. 여성은 보호해야 하는 존재일 뿐 진정한 친구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쟁을 통해 얻어졌기 때문이리라(원주민과의 전쟁, 남북전쟁, 내전, 멕시코와의 전쟁, 무법자들과의 전쟁 등).
 
 
 부코스키 데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책임감 지수를 최고치로 끌어올려야만 하는 서글픔을 달래려 작은 일탈을 시도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언더그라운드 시인을 멀쩡한 정신으로 읽는 건 작가에 대한 모독? 이므로 위스키 한 병을 준비해 결국 바닥을 보고 말았다.
 

  몰상식하다, 무책임하다란 말, 한 번쯤 들어보는 건 어떨까. 그리 나쁘거나 큰일 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안 해봐서 그런 거지. 진정 내가 욕망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애쓰지 마라(don't try).


그의 묘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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