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건강한 성인이 되었다.
본가와 연락을 끊은지 4년이 다 되어간다.
난소암 수술을 받고, 여섯차례 항암을 받은 후 한달하고도 보름이 지나 직장에 복귀를 했다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업무를 다른 업무로 바꾸고 나니, 낯선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터라 더더욱 긴장하는 시간이 되었다.
모든 미팅을 녹음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이해의 속도가 느렸다.
겨우겨우, 하루만큼의 삶만 생각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는 약 반년이 흘렀다.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던 시절은 코로나 시절이긴 했지만, 요양병원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버지 한 분 이었다.
나를 키워준 어머니는 한 번 왔었고, 식사만 하고는 황급히 돌아가버렸다. 친정 집앞 까페에서 잠깐 보자라고 하더니, 참외인지, 한봉지를 내밀었다.
집에 가서 먹으라는 거였다. 나는 전염병 환자가 아닌데, 친정에 들이지도 않다니.. 그 후로 나는 친정집에 발을 디딘적이 없다. 내 의지가 아니고,
그 가족의 의지로. 명절이든 아버지 생신이든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존재구나.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서도 나는 그들에게 그런 존재구나.
그럼 나도 똑같이 대해 주어야지. 남보다도 못한 존재로 연락하고 싶지 않은 존재라면, 나도 그렇게 해줘야지.
그리고는 어느날,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당신 생일에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며, 당신이 코로나에 (약하게) 걸렸는데, 그정도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며 엄청 분개하며 얘기를 했다. 통화 말미에, 너 이제 앞으로 30만원씩 생활비로 보내라. 너 좋은 일 많이 한다며? 후원도 많이 한다며? 나한테도 그 돈 줘라. 나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며? 이제 돈 보내라. 나는 35년 만에 처음으로 큰 소리로 얘기했다. 싫어요.
드릴 돈 없습니다. 라고. 그리고, 어머니랑 친한 김 권사님, 박권사님한테 물어보세요. 누가 항암을 마친지 일년도 되지 않은 암환자에게 돈을 달라 하는지?
그 다음말.‘ 너 다 나았잖아.‘ ‘ 그리고 난 니가 그럴 줄 알았다. 우리집이랑 인연끊으려고 결혼하고 했던 거 알고 있었다고.
미친듯 웃다가 소리쳤다.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리고나서 지난 주, 미국사람과 결혼한 언니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가족들과 절연했고 내가 카톡 을 차단해 버린 것을 안 언니가
내가 알지 못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 못보면 평생 못보고 살것 같은데, 얼굴 볼 수 있냐고.
아니. 보고 싶지 않아. 우리가 그런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언니 역시 동의했다. 그렇지.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 그래, 건강하면 됬다.
그런데, 00가 (언니남편) 그러더라, 단짠이가 제일 좋은 가족이었다고.’
그래, 나는 가족이 그리워서, 가족으로 대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매달 30만원씩 내놓으라는 말이었지만.
그런데,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니, 내 결혼식이 개혼이었으니 그 때 내 앞으로 들어온 돈 다 해드셨잖아요? 그 걸로 퉁치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