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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Aug 01. 2021

삶에 표지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평] 연금술사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이 세계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이 있을 것이라 믿어왔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하게 되는 이런 수많은 과정이, 사실은 미지의 존재가 설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나의 뒤를 봐준다는 함께 믿음은 꽤 희망적인 메시지이지 않은가? <연금술사>에서 희망을 보았다. 재밌었다.




<줄거리>


산티아고는 양치기였다. 어느 날, 반복되는 꿈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양들과 함께 걱정 없이 별을 보던 그는 그 꿈 때문에 자신의 삶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연히, 노인을 만나 ‘표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현재의 삶을 떠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중 물질적인 모든 것을 잃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등 여러 사건을 겪는다. 현재의 삶에 안심하게 되는 안정적인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친 사람들은 그에게 떠나야 한다는 동기를 주었고, 자신이 처음 여행을 떠나온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결국 그는 간절한 소망을 이뤘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낸 산티아고는 물질적 보상인 보물을 얻어냄과 동시에, 정신적 성장에 대한 보상인 ‘사랑’을 향해 되돌아간다.



<‘자아의 신화’와 ‘표지’, 모호한 표현>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아의 신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간절함은 당신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바람과 비 같은 자연환경이 자신이 만들어낸 성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라고 보았다. 그 성을 파괴시킬 정도의 큰 바람은 꽁꽁 메어진 자아를 더 큰 세계관으로 내보낼 기회를 준다. 자신을 지키는 외벽을 ‘간절함’이라는 도구로 파괴해야만 진정한 자신을 알 수 있다.


한낱 미물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의 발생’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표지’들은 누군가가 의도한 것도, 설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과정에서 발견되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표지’로써 인식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현상에 특별한 의미를 주입하는 것.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소망에 하나의 계단을 만들어주는 것. 무의미를 사소함으로 바꾸어주는 것. 이것이 이미 우리 주변에 있는 우주의 기운을 인식하는 과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도 역시 나약한 인간이다. 간절했던 그의 소망은 매번 사건에 부딪히며 약해졌다. 물질적인 유혹, 안정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을 세상의 물길에 놓아버렸고 표류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간절했던’ 덕인지, 간절함을 상기시키는 일들이 우연하게 벌어졌다. 전체적으로 그는 우연을 ‘마크툽’이라는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예감, 어머니가 자주 입에 올리던 말이었다. 그는 ‘예감’이라는 것이 삶의 보편적인 흐름 한가운데,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들 속에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방식으로 펼쳐져 있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모든 일이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크툽” 산티아고는 크리스털 가게 주인을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마크튭, 이 소설에서 외부인이 사용하는 아랍어로,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 있는 말이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미 정해져 있는 길, 길목에 자리 잡은 ‘표지’들이 ‘마크튭’의 조각들이다. 운명은 스스로가 개척하고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짜여 있는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소설 전체에서 등장하는 ‘자아의 신화’, 즉 ‘자신의 삶은 자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결이 다른 것 같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무척 빨리 배우는 것 같아. 아마도 그래서 그토록 빨리 포기하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게 바로 세상이지.”


꽤 오래전에 책을 읽으며 필사한 부분이 생각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진리를 깨우치려 하지 마라’ 누가 이런 글귀를 써 놓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인상적인 문구로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자신만의 ‘진리’를 형성하는 데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냐. 나는 이 글귀를 ‘진리를 발견했다고 착각하지 말아라’로 해석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먼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진리’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명언으로 위장된 문장들이 싫다. 보편적으로 납득시키기 쉬운 문장은 그만큼 구멍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자세는 훌륭하다. 배움의 과정 한 챕터씩 하나하나 완수해 가며 조각조각 얻을 수 있는 것이 ‘인생의 이유’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나마 개인의 삶이 녹아들어 간 ‘진리’는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저하게 개인에서 자라난 진리는 타인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 진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타인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세계는 무슨 모양인가요?>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몇 년을 살았던, 수십 년을 살았던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한정된 시공간에서 산다. 높은 성을 쌓는 것이다. 자기 방어를 위해 그 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성이 재질이 무엇이든 얼마나 높게, 두껍게 쌓았는지에 관계없이 어떤 계기로 완전히 무너지기도 한다. 특별한 계기 없이도 불어온 바람에 풍화되기도 한다.


매 순간 함께하는 미지의 존재는 이런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희망을 선물한다. 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동기를 위해 자아가 창조해낸 관념적인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당신이 쌓아 올린 성, 그곳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는가. 그곳에서 비는 내리는지, 중력은 존재하는지, 바람은 부는지 궁금하다. 또한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그 영역은 외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그 세계는 반드시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긍정적 변화일지 부정적 변화일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자신만의 세계관은 자신만이 변형할 수 있다.

무언의 언어, ‘우주의 언어’




<에필로그>


‘우주의 기운’이라. 이상하게도 이 글귀가 익숙했다. “어? 이 문장.”

‘온 우주가 도와줄 것’이라는 글귀는 몇몇 사람의 악용으로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문장이다.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런 선한 목적로써만 사용되었으면 한다.


사실 <연금술사>는 호불호로 평가가 많이 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소설 전체에서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사례로써 호소하는 작품이 아니다. 나는 작품의 이런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말로써,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분명 발생한다. 이유가 없더라도 확실한 무언가의 믿음으로 위기를 자연스럽게 극복하는 편이 조금 더 나은 방향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하드 표지는 언제나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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