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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Aug 21. 2021

나는 왜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을까

[서평] 글쓰기의 최전선

책 읽기를 좋아한다. 책에서 흘러나오는 생각들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에 내용을 필사하기도 하고, 모임에 나가 말로써 내용을 정리하기도 했다. 꽤 적극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 빠진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 일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책을 읽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시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의문점이 항상 발 뒤에 떨어져 있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어떠한 자격이 주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온갖 생각, 정보, 지식 등이 책을 덮은 이후 급격하게 증발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찜찜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 같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글을 남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습작이라고도 하기 부끄러운 정리되지 않은 글들이었다. 어느 시점이라고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공책과 메모에 내 생각들이 빼곡히 채워져 나갔다. 이런 행위들은 앞서 가졌던 불안감을 줄여주었다. 그리고 남겨놓은 글들을 봄으로써 그때의 감정, 새롭게 얻은 지혜들을 다시 상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실패. 며칠, 몇 주 뒤 다시 읽어볼 것이라는 기대되는 달리, 난 그 수많은 습작들을 돌아보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돈되지 않은 감정 덩어리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금의 독서>


나는 욕심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것들을 다독으로 채워 넣고 싶었다. 새로 들어올 지혜들을 맞이하기 위해, 새로운 자리만 마련하기 급급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먼저 들어온 ‘선배’를 잘 챙기지 못해 그들을 떠나보냈다. 떠나간 아쉬움을 느끼기 두려워, 나는 그들을 다독이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반성하고 먼저 들어온 지혜들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어주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평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책을 다시 읽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말이다. 쌓여있는 빤빤한 책들이 서로 먼저 읽어 달라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 목소리를 무시할 용기가 없고, 각자의 ‘민원’을 들어주는 것이 만족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항상 잔여물로 남는다. 전에 불안감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서평 또는 독후감은 아쉬움을 달래준다.


<쓰기 시작>


사실 글쓰기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글쓰기의 객체가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는 사실에 허무감을 느꼈다. 내가 글을 쓰는 주체가 자신이고 싶었다. 남에게 보여지는 글 따위는 설득을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다. 때문에 목적 없는 일기만을 고집했고, 그 글은 쓴 사람마저 읽기 불가능한 낙서가 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또 읽어도  맴도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타인을 향한 글쓰기는 도전이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알게 모르게 누적되어왔던 다짐이 손가락으로 옮겨졌다. 독후감이야 학창 시절에 많이 써오던 것이기에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글쓰기를 포기한 기억이 있다.


이후 답답함이 슬금슬금 올라와 다시 펜을 잡았다. 사람들이 글을 남기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 매주 독서모임에 가서 그 이유를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글쓰기를 습관으로 가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의미를 물었다. 하루는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글 쓰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단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요?” 나의 물음을 받은 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해 쓰다 보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나요?” 이날을 부끄러운 날로 기억한다. 다들 비슷한 의미에서 글을 쓰는데, 나라고 특별히 글쓰기에 장황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쓴다.’ 부담감을 덜어내면 그 나름대로 글쓰기가 습관이 되는 것이었는데, 과한 욕심이 드러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진리를 담겠다느니 하는 과한 주제들을 버렸다.


그렇게 하나하나 서평을 적어나갔다. ‘다시 읽기’는 또 다른 도전이니 뒤로 미루고, 완독 한 것을 정리하고 기억에 남기기로 한 것이다. 나의 첫 서평은 실패작이고, 온갖 추상이 종합된 음식물쓰레기 같은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몇 주간의 시간 동안 끙끙거리던 뿌듯함이 남아 지금까지도 가끔 탐구하듯 다시 들여다본다.


<물리적 계기>


‘브런치 작가 되기’에 성공했다. 사실 어이없게 작가가 되었다. 블로그에 게시한 서평 하나를 긁어다 조금 수정해 지원서에 넣었는데, 덜컥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기분이 어질 했다.  ‘최소한’ 내 글이 읽어줄 만하다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운이 크게 남았다. 살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재질의 기쁨이었기 때문에 글쓰기에 열을 올리게 된 물리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까지는 가시적인 결과가 남지 않는 고독한 정신적 싸움이었다고 하면,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았기 때문에 물리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브런치에게 감사한다.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내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의 최전선, 서평>


이 책은 좀 더 이른 시기에 만났다면 나는 무슨 삶을 살고 있을까. 아마도 예전과 똑 닮은 글을 쓰고 있었을 것 같다. 이게 무슨 소리냐. 나는 이 책을 ‘그’ 시기에 적절하게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갈증이 해소되듯, 모든 글귀에 감응이 온 것이다.


글을 인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의 글에 대한 태도는 역시 뭇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생애의 모든 순간이 텍스트와 글에 연결되어있다. 그것을 연결 짓는 힘은 세상을 바로 보는 것에 저항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삶의 양식은 좋은 기록과 좋은 텍스트를 남기는 강력한 엔진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전문적 글쓰기에 관심이 생겨 책을 집었지만, 전반적인 인생조언을 며칠 동안 경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작가의 의견이 온전히 나에게 들어와 깊은 흔적을 남겼다. 형광펜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모든 구간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이야말로, ‘다시 읽어야 할 책’ 인 것이다.



“글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불행한 상황이 뚝딱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줄 한 줄 풀어내면서 내 생각의 꼬이는 부분이 어디인지, 불행하다면 왜 불행한지, 적어도 그 이유는 파악할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꼬인 생각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큰 역할을 한다. 매번 이런 경험을 겪는다. 내가 가진 생각은 이러한데, 이것을 글로 온전히 풀어낼 수 있을까? 마치 외국인과의 대화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읍읍’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답답한 상황 말이다. 쓰기 또한 그러할진대, 말은 오죽할까. 유창한 말하기는 유려한 글쓰기의 다음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글쓰기는 기록된 테스트를 타자에게 전달하기 전에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글쓰기부터 연습해보자.

일기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갈 곳을 헤매던 손은 종이로 향하게 된다. 힘듦을 함께 감내해줄 타인 또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알기에, 고함칠 곳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란은 글쓰기에 의해, 내면에서 질서를 어느 정도 되찾게 된다.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안정을 되찾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된다. 현재의 고통을 나중일로 미루는 것은 습관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곪을 것을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거기까지 가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기는 것 같다. 본능적으로 말이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책을 통한 경험. 이것은 간접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살며 직접적으로 겪는 과정은 매 순간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타인의 경험을 흡수한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잔인한 상황에서의 완충작용을 한다. 나아가 지평이 넓어진 생각은 글쓰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세상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 주변부터 시작하여 멀리 달아나지 않도록 뻗는 내면의 팔은 내가 닿을 수 있는 포용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너무 추상적일까.



“생의 모든 계기가 그렇듯이 사실 글을 쓴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전부 달라진다. 삶이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며 더 나빠져도 위엄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가 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자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내 생각에는 글쓰기다.”

대상에 대해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식의 주체는 자신이어야 한다. 의미는 물론 밖에서도 형성될 수 있다. 뉴스를 보면 수많은 갈래의 의견이 쏟아져 나오듯, 사건과 현상에 대해 타인이 생각하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수많은 댓글, 대댓글 속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화가 난다든지, 회의감이 든다든지 하는, 대상이 받아내는 모든 감정들에 대해 그것이 온전한 것이라 어떻게 확신하는가? 자신만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확신할 수 있다. 의미를 투영시키는 것도 같은 말이라 생각한다. 어렵지만 그나마라도 선명한 방법이지 않을까. 감응이라는 것은 감동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것이지 않을까. 감동은 굵직한 한방으로 큰 충격을 받지만 감응은 솜방망이로 여러 번 맞아 생기는 푸른 멍 같은 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을 쓰기 어렵다.”

비판받을 글을 쓰자. 나의 성장을 위해 비판받자는 다짐을 했다.

비판받는 글은 어떤 재질인 것일까. 거슬리는 글을 쓴다는 것은 보편에서 벗어난 행위이다. 보편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세상을 다른 길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멀리서 보아야 실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멀다면 그들의 숙덕거림을 들을 수 없게 된다. 그 숙덕임은 나에 대한 평가이다. 우리가 험담을 두려워하듯, 글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통이다. 작가는 이런 두려움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확신하는 ‘사실’을 밖으로 내놓는 과정이 글쓰기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어떠한 존재와 부딪치게 된다. 그 확신이 부실하면, 금세 깨져버린다. 그러나 파괴됨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단단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오듯, 또 다른 확신을 다시 만들어낼 공간이 형성된다. 내면에서 생성된 자기만의 확신은 부서질수록 부드러운 것이 된다. 그리고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움이 형성된다. 그 자연스러움은 비로소 좋은 글로 승화된다.



“철학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려고 하는 것이라고 푸코는 말했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타인과 다른 생각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보편에 약간 벗어난 사고를 한다는 것일까. 동일한 맥락과 상황에 놓인다면, 나와 같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까. 결국 큰 흐름에서 인간을 비슷한 사고의 틀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이물질 취급해서는 안될 일이며, 이물질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긍정을 잃을 필요도 전혀 없다. 비난하는 그마저도 보편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게 되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삶에서 근원적 물음을 따지게 되는 때가 있다. 슬픔, 분노, 화와 같은 부정적 감정에 휩쓸려 있을 때, ‘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런 때에만 심오한 물음이 생겨날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하루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지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한다. 실존적인 삶에 필연적으로 매인 인간은 본질적인 물음에 답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말이다. 이것도 연습하면 가능하다. 생각은 생각으로써 바람과 같이 스쳐가지만 글쓰기는 그것을 붙잡을 도구를 제공한다. 공기는 잡을 수 없지만 봉투로는 공기를 잡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다가온 주제에 대해 한 줄, 한 단어 글을 기록함으로써 생각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 붙잡힌 근원적 물음을 매일매일 추궁하다 보면 보다 선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타인의 생각으로 간을 맞추는 것도 도움이 된다.


“왜 그런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표현을 쓸까. 두 가지 이유로 짐작한다. 하나는 생각을 멋있게 쓰고 싶어서다. 또 하나는 있는 그대로 다 말할 수 없어서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경우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로 글이 활발히 써지지 않는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없던 용기가 생기려면 삶의 조건과 존재의 형질이 변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어쩔 수 없다. 생각을 멋있게 쓰려는 의지는 금세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몇 편 써보면 스스로 안다. 자기 글이 남들에게 안 통한다는 사실을.”


가장 동감이 되는 내용이면서도, 두려운 사실이다. 멋진 글을 쓴다는 것. 나의 글은 좋은 글일까 하는 궁금함이 있다. 일기와도 같은 글은 타인의 검열이 전혀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만족스러운 글이 형성이 된다. 하지만, 보이는 글은 형편없다. 그 이유를 거의 정확하게 짚어준 문장이다. 멋있게 쓰고 싶다는 욕구와 생각 그대로를 쓰는 것을 적절하게 섞기 너무 어렵다. 멋있게 쓴다는 것은 비판받을 경우의 수를 줄일 수 있다. 날 것의 생각을 쓴다는 것은 비판받을 경우의 수를 늘린다. 적정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잔근육을 쉴 틈 없이 사용해야 한다. 높은 생각 체력을 요구한다. 적절히 타협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내려놓게 된다. 작가가 쓴 ‘용기’라는 것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용기’로 해석했다.




<에필로그>


이 책이 좋았다. 뒤를 돌아보게 함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글을 왜 써야 하는가. 좋은 글을 어떤 것일까. 궁극적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선명해진 느낌이다. 안경을 처음 맞추러 갔을 때 기억이 난다. 시력검사를 할 때, 도수를 맞추는 과정에서 써야 했던 그 무거운 실험용 안경 말이다. 렌즈를 하나씩 수정할 때마다 먼 곳의 글자가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책과 글쓰기는 하나씩 끼워지는 렌즈인 것 같다. 사물을 선명하게 볼 능력이 생긴다는 것.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나는 글을 쓴다. 시력이 다시 나빠지면, 다시 안경을 맞추러 갈 것이다. 비싸더라도.


형광펜이 많이 닳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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