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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Sep 08. 2021

고전을 꼭 읽어야 할까요?

[서평]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주는 것들, 정재형


협찬을 받아 서평을 쓰게 되었다. 요새 고전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책을 제공받을 것에 대해 기뻤다. '고전에서 찾은 나만의 행복 정원'을 부제로 달고 있었다. 그간 철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 행복의 근원에 대해 조그만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들었다.


작가는 한 달에 50권의 책을 읽는 애독가, 서평가이다. 그리고 독서모임을 운영하며 인문학 전도사로도 활동 중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팔로우하고 있던 작가였다. 수많은 책들, 그리고 좋은 글을 짤막하게 피드에 남겨두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영감을 주었던 존재였다. 소개받은 책을 몇 권 사서 탐독하게 되었다.


괜찮은 책이었다. 하나하나 서평을 남기다 보면 이렇게 한 권에 묶은 책으로도 발간할 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총 28권의 고전문학을 소개한다. 좋았던 점은 학문적, 실용적 철학에 대해 저자 개인의 견해가 많이 담겨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니체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니체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사상 등의 다양한 사상가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추상을 다른 도서에 적절하게 녹여내어 이질감이 없도록 글을 썼다.


목차는 크게 6 범주로 나누어져 있다.

1장,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2장,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3장, 단 한 번뿐인 삶, 욕망하라

4장,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5장, 내 삶의 의미를 묻다

6장, 행복해지고 싶을 땐


각각의 범주는 4~5가지 서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범주에서 최소 한두 권씩은 전에 읽어봤던 책이라 다시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외 읽어보지 않은 책은 당장 구매해서 읽어보고 싶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자극했다.



<고전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삶의 어느 순간엔가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정신적인 무언가를 얻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 사람에게, 고전문학 탐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많은 이들은 고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오랜 세월 생존해온 기록들은 현대인에게 정신의 정수가 되어 왔다. 그렇다면 왜? 고전을 읽어야'만'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고전문학이 필수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반드시 현시대 삶과 시간적으로 거리가 멀지 않은 작품들도 병행해서 읽어야만 한다. '지금'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큰 틀에서 인간의 삶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혹자는 이야기하지만, 미시적 측면에서의 우리의 삶은 당장 2년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특히 요새 전염병이 유행하고 발생한 여러 상황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을 인식하는 과정이 있어야 근원을 파악할 '과거'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대상을 먼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 대상은 비교적 현대에 기록된 문헌들을 통해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쉬이 고전문학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에 대한 표면적 이유는 ‘표현방식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글자만 보지 않는다. 내용을 이해하려 한다. 고전은 일단, 그 ‘언어’가 다르다. 지금의 언어는 합리성이 먼저이다. 생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먼저이다.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목적이 선행되는 반면, 고전은 시작점이 다르다. 자신의 고뇌, 자신의 이야기가 선행된다. ‘원활하게’ 납득시킨다기보다는, 다른 곳에 먼저 목적이 부여된 느낌이다. 자신만의 표현, 언어를 재구성하여 기록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꼬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자국에서 먼저 꼬아놓은 표현은 번역 과정에서 타국의 언어로 재구성하기가 까다롭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괴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문장 구성 파악이 힘들어지고,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의 문학이 모두 합리성을 선행으로 두지는 않고, 상대를 납득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의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이 읽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선택받으려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료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런 사조가 발생한 것으로 본다. 고전을 읽는 사람은 읽지만, 읽지 않는 사람은 손에 두기 어려운 경향 말이다.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주는 것들>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 니체는 인간의 모든 행복은 세상의 슬픔과 화산처럼 분출하는 온갖 재앙과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양면성을 갖는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등 바람직한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의 시기들이 우리 인생에 주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원하는 진정한 행복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삶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을 지라도, 행복이라는 자신만의 작은 정원을 만든다면 살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여 어떻게 해야 내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바로 ‘고전 문학’에 있다.첫째, 고전 문학은 타임머신처럼 과거 속으로 여행할 수 있다.
둘째, 고전 문학은 우리에게 다양한 간접경험과 창의성을 제공한다.
셋째, 고전 문학 속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고전 문학에서 우리는 어떻게 힘든 삶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다섯째, 고전 문학은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가, 에필로그>


이번 서평에서, 나는 저자의 말만 발췌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수많은 발췌 문장, 명언들이 들어있지만 그것을 가져 다 쓰고 싶지 않다. 내가 읽어보지 못한 고전 속 명언은 앞뒤 맥락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 이것은 인간이 가지는 평생의 과제이자 본능이다. 아마 평생 찾지 못할지도 모르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어떤 시도와 노력을 하는가.

삶의 모양은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의 개체수와 같다. 그 모든 사람이 책과 텍스트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는가. 절대 아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깨달을 수 있고, 박식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인생의 의미를 평생 찾지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전은 홀로 살아가는 의미를 절대 부여할 수 없다. 수단의 한 조각이 될 수는 있을지 언정. 중요한 것은 수단이 아니라,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에 있다. 힘든 순간을 겪고 난 후의 회고, 잠에 들기 직전 스친 인생의 의미, 열정적으로 자기 일을 하는 도중 찾아오는 사유의 순간. 모든 경우에서 인간은 살아야 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저자가 제시한 내면 성장에 대한 다섯 가지 해답이 ‘고전문학’ 뿐이라면 글쎄. 저자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시점에 쓰인 문학 또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고전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한번 더 상기시켜주었으면 한다. 의미가 절실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이 책은 좋은 책일까>


이 책을 좋은 책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아니다. '취향 차이로 호불호가 갈린다'라는 듣기 좋은 표현으로 이 책을 표현하고 싶다. '읽어야만' 하는 책은 아니다.

 

고전은 고전 그 자체를 읽는 행위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전의 해설집만 읽어서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으로 표면적인 것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책은 내가 읽었던 책이지, 이 고전은 안 읽어봤는데 읽어봐야겠다, 결국 이 사람도 같은 생각을 했구나. 그나마라도 비판적으로 읽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집중을 놓치는 순간,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길을 잃게 되었다. 아무래도 전체적인 책 구성상 내러티브적 요소가 부족한 것 같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장르이긴 하다. 서평집이라는 것은 말이다.


나는 협찬을 통해 이 책을 얻었다. 서평을 엮은 책이고, 서평을 서평 하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원문에서 파생된 평가글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색이 옅어지기 마련이다. 같은 맥락에서 발췌문에 대한 발췌는 원초 의도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 서평이 이런 위치이다. 그럼에도 평을 남기는 것은 이 책을 짚게 될 누군가에게 참고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서평 에필로그>


나는 <책은, 도끼다>라는 도서가 생각이 났다. 맥락의 구분이 명확한 책이다. 관심의 가지를 넓게 퍼뜨리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고전 서평은 아니지만, 삶의 의미에 관심을 둘 수 있도록 하는 명확한 의도가 있는 책이다.


나는 최근 여러 권의 해설 책들을 끼고 니체의 고전을 완독 했다. 만약 내가 해설된, 정제된 사상만을 배웠더라면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었을까? 전혀. 해설은 철저하게 조언의 역할이고 나의 깨달음은 고전 원문에서 얻고자 했다. 이 같은 시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사실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다. 어려운 고전이든, 읽기 쉬운 고전이든, 내가 며칠 몇 주간 그 책을 붙들고 있는 기간만큼은 온전히 내가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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