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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Jul 22. 2021

미시감과 기시감 사이에 놓이다.

[서평] 1984, 조지 오웰

미뤄왔던 과제를 끝낸 기분이다. 조지 오웰이라는 숙제는 지금 내가 관심을 쏟는 '의심'과 '착각'이라는 주제에 대해 반드시 필요한 조각이었다. 이 책은 정말로 큰 조각이었다. 흘러가는 세상에 대해, 구조적인 통찰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달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말이다. 나는 부족하기에, 지금은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지만 그보다 큰 목적이 생겼다.



<줄거리>

‘빅브라더’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 빈틈없는 감시체제와 극단적인 규제, 전쟁을 통해 대중을 세뇌시키는 환경에 주인공 ‘윈스턴’은 미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내 저항하게 되며, 반체제 목적을 가진 단체에 가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의 함정이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다시 ‘빅브라더’를 인정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발췌문과 생각>

"전쟁은 곧 평화이고 자유는 노예를 만들어내며 무지는 힘이 된다"


빅브라더의 사상. 사상의 세뇌를 위한 당의 구호이다. 3개로 표쪼개진 문장에 ‘당에게’라는 목적어를 붙이면 <1984>에서 묘사한 사회상을 그대로 관통하는 글귀가 된다. 불편하지만 현 사회의 양상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무지’에 대한 것. 어떠한 대상에 대해 모른다의 차원을 넘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세상이 도래했다.


만약 사람의 심장이 불편함과 더러움, 부족함, 끝없이 계속되는 겨울, 형편없는 양말, 한 번도 작동한 적이 없는 엘리베이터, 차가운 물, 거친 비누, 조각조각 부서지는 담배, 끔찍한 맛이 나는 괴상한 음식 때문에 병들어 간다면 이 모든 게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왜 사람은 과거가 지금과 달랐다는 오래전의 기억도 없으면서 이런 것들을 참지 못하는 걸까?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있을까? 어쩌면 보통 사람들이 혁명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는 유일한 증거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과 지금의 삶이 참아내기 어렵고 다른 시대에는 달랐을지 모른다는 직감뿐이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진정한 특성은 잔인함과 불안정성이 아니라 부족함과 음산함, 무기력함이라는 생각이 윈스턴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윈스턴은 당연한 세상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분명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미시감을 말할 대상이 없다. 왜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가?

나도 이런 구렁에 많이 빠진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주변과 다른 의견임에는 틀림없다. 누가 옳은 것일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는가? 이곳에 모순이 있다. 사회적 틀안에서 타인과 다르지 않음에 안도하지만, 타인과 다르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나는 사회의 흐름을 무시한 채, 개인으로 남아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내가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에 순응하는 ‘척’을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소설에서는 이 모든 생각, 즉 사상이 금지된다. 표정과 몸짓이 남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반체제 인사로 의심받는다. 평범함을 ‘연기’조차하지 못하는 소설 속 지독한 환경은 현실과 조금 다르다.


골드스타인은 체제에 반하는 사상을 가진 '레지스탕스'이다. 처형되었지만 그가 가진 사상은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되었고, 그가 저술한 책과 문장은 금기로 여기어졌다. 다음 발췌한 내용은 윈스턴이 전달받은 골드스타인 책의 일부이다. 마치 현실에서 발생했던 두 번의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하다.


문제는 세계의 실질적인 부를 늘리지 않으면서 산업사회의 바퀴를 계속 돌리는 것이었다. 재화는 분명 생산되어야 하지만 굳이 분배할 필요는 없었다. 이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전쟁뿐이었다.... 비현실적인 전쟁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전쟁은 남은 소비재를 고갈시키고 계급사회가 요구하는 정신적 분위기를 보존한다. <과두적 집단주의 이론과 실행> 이메뉴얼 골드스타인 지음"


소설 속 배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폭발 소리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당에서는 진짜 ‘전쟁’ 중임을 대중에게 암시하지만, 그것이 허구임을 느끼지는 못한다. 가짜 전쟁은 대중의 자극과 감정을 뽑아내고, 이를 동기 삼아 공장을 돌리고 소수의 살을 불린다. 대중은 소수에게 철저히 이용당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은 소수에게 정신을 착취당하는 사회인 것이다.


현재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능력은 있지만 부족한 일자리와 권력에 목마른 사람들이 새로운 그룹을 만드는 것 그리고 자유주의와 회의주의가 성장하는 것이 실제적인 위험이다. 말하자면 문제는 교육이다. 지배계급과 그 바로 밑에 존재하는 거대한 실행 계급의 의식을 지속적으로 형성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대중의 의식에 대한 영향력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작용되어야 한다.


과거에 비해 앎을 얻을 기회가 많아졌다. 검색하면 무엇이든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검색된 정보는 나의 것이 되었는가? 안타깝지만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대여’했을 뿐이다. 빌릴 수 있는 수단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지만, 이것은 곧 증발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현대인은 착각에 빠지게 된 것 같다. 자신은 많이 알고 있다고. 빌리는 게 쉬워진 것뿐인데도 말이다.




<서평 에필로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음이 너무 모호하다면, 지금의 삶은 만족스러운지 묻고 싶다. 만족스럽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고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에 대해 초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편적으로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결과를 조정할 수는 없기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사회'를 방금 전 물음의 주체로 둔다면 어떨까? 사회는 개인의 죽음을 '제어' 할 수 있는가? 개인주의, 사회보다는 개인이 '먼저'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꽤 부정적일 것이라 예상한다. 하지만 '현대'라는 세상에 도달하기 전, 더욱더 혼란한 시기였던 시기의 '사회'는 개인을 통제하고 제어 가능한 대상으로 보았다. 절대왕권, 전체주의 등이 그것이다. 세상은 개인과는 거리가 먼 사상을 먼저 깨우쳤고 (정확히는, 그것밖에 몰랐던 시기이지만) 그것이 억울하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동안 부조리가 부조리임을 자각하게 하는 지식과 지혜가 축적되었고 이윽고 개인의 가치가 사회의 가치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그렇기에 현대인은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정확히는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과거보다야 개인이 많은 것을 영위하고, 성취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회'라는 집단적 환경에 놓여있는 이상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결국 과거와 큰 차이 없는 환경에서 개인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984>는 집단과 사회의 부조리, 불합리, 그리고 당시의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깨우침을 준다. 인터넷을 통한 개개의 연결, 모든 것을 검색만 한다면 원하는 정보에 도달할 수 있는 우리는, 반대로 치밀한 감시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쓰인지 꽤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기술적 표현이 현대와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같은 작은 요소가 독자들의 이해에서 배제될 만큼, 감시적이고 부조리한 한 사회 분위기를 묘사했다. 그리고 현재도 그러하다고 느낄 만큼, 그 분위기를 '지금'으로 적나라하게 끌고 들어왔다.


나는 <1984>를 읽고 '알베르 카뮈'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지 오웰'이라는 사람에 대해, 미래를 내다볼 만큼의 탁월한 통찰력이 있는 천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당시의 미래에 대해 정확히 예상했다는 측면보다는, '사회 속의 인간'이라는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 능력 자체가 경이로웠다. 또한 정확한 분석을 통한 비문학적 설득이 아니라, 사회 흐름을 추상적일 수 있는 소설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에 놀라웠다. 


다음은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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