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총, 균, 쇠>
‘나는 어떤 역사의 결과일까?’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총, 균, 쇠>는 물음에 대한 여정 중 하나였다.
과거의 사건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과거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현재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근거를 기반으로 한 ‘추측’ 뿐이다. 물리적으로 뿌려진 사물과 현상을 통해 그저 과거 사건을 재해석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보기에 따라 구멍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신빙성을 얻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독자들에게 유효했다. 말 그대로, 설득력이 강한 주장이 되었다.
<총, 균, 쇠>는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인류사 큰 흐름을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인류를 조금 뒤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객관적 시도이다. 주관을 배제하고자 하는 이 책은 비교적 객관에 가깝다 생각한다.
아는 것은 힘인가. 모르는 것이 약인가. 지금의 나는 전자를 추구한다. 인과에 대해 관심은 마약과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적 갈증을 유발한다. <총, 균, 쇠>는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었다. 참 두껍지만, 몰입하기에 쉬운 책이다. 책의 두께만 보고 도망가지 않았으면 한다.
<총, 균, 쇠>는 4장의 큰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목차별로 정리했고 장마다의 짧은 사유를 적었다. 1장부터 시작한다.
<1장,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결국 인류의 현재라는 결과는 과거의 수많은 인과에 의해 존재한다. 수많은 원인들을 연구하고 고찰하는 가운데 신빙성 있는 추측들이 생겨났다. 각각 개인이 가진 개인적 근거에 의해 주장된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으며 의심에 그친 추측일 수 있다. 주장의 근거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납득될 만한 관찰 결과들이 필요한데, 과학적 기법은 근거를 뒷받침해줄 강력한 수단이 된다. 방사성 탄소 연대법은 좋은 예시이다.
제목에서도 그렇지만, 인류 역사는 총, 세균, 쇠에 의해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과정을 거쳤다. 문명 발전에는 분명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단순히 큰 사건과 어떠한 현상에 기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결국 작은 인과 사슬로부터 시작된다. ‘나비효과’라고 할까. 우리는 인류사에 남은 유명인을 알고 있다. 나폴레옹, 아인슈타인, 소크라테스, 공자 등등. 지성인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특별해서 일까. 특별취급받는 지성인 들은 어떻게 현재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일까. 저자는 그에 대한 대답을 ‘환경’에서 찾았다. 저자의 집필 이유는 작은 것이었다. 한 원주민의 의문점에서 시작되었다.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현대사회는 예전보다는 형편이 나아졌다고 평가받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연하다. 인종주의는 나치 히틀러가 자행했던 민족주의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우리가 너희를 정복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종이’ 너희네 ‘종’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논리로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인간을 학살했다. 이러한 치욕적 인류 사례에 반발심을 가진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저자는 특정한 종이 번창한 원인을 앞선 극단적 사례가 아닌 ‘지리 환경’으로 두었다.
<2장, 식량 생산의 기원과 문명의 교차로>
수렵과 농경. 수렵과 채집이 풍기는 느낌은 어떤가.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는 느낌이 드는가. 오해가 있다. 사실 수렵채집을 생활양식으로 삼던 인류가 훨씬 건강하고, 심지어 똑똑했다고 한다. 저자는 농경사회가 도래하여 질병과 전쟁, 인간의 악행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안락해 보이는 정주형 농경사회가 불평등한 착취구조, 반란, 살인 등과 같은 반인류적 행실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이 같은 흐름을 이해하며 다소 ‘어쩔 수 없었다’라는 느낌 탓에 많은 많은 독자가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폭력에 대해 대놓고 정당화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폭력의 역사를 비판하는데 부실했다는 평이다. 나는 이러한 흐름을 느끼지는 못했다. 인간의 폭력적 본성에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선을 추구하는 노력으로 인류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생각한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는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언제나 공통적인 요소는 조밀한 대규모 인구와 정주형 생활이었다."
저자는 인간의 유전적 개선과 농경의 발전이 인류 발전사에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말한다. 인간이 지금의 인간으로 정의될 수 있는 유전적 변화는 이후 수많은 결과를 낳았다. 결과 중 하나가 농경의 발전인 것이다. ‘불의 발견’ 등과 같은 주요한 ‘발견’ 또한 이러한 인과 사슬의 시작점에 포함시킬 수 있다.
‘식물의 작물화’ ‘동물의 가축화’도 마찬가지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동식물을 다루는 방식은 인간이 위치한 지리, 기후적 특성은 문명과 문화의 생성에 기인한다. 미국, 중국, 유럽 등의 국가가 생성된 근본 원인에 대한 주장이다. 육상 생물은 물 위를 다닐 수 없다. 따라서 지리적 요소에 의해 생물의 이동경로는 철저히 제한된다. 따라서 동물의 거취는 생태에 큰 영향을 준다. 자연이 차려준 밥상을 먹을지 안 먹을지는 생물이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먹지 않는다면 그 종은 도태된다. 자연에 적절하게 저항한 종만이 현재까지 살아남았다.
<3장, 지배하는 문명, 지배받는 문명>
고대사회를 지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면서 농경사회에서 파생된 결과물이 있다. ‘세균’, ‘문자’, ‘발명’, ‘정치’ 네 가지 요소는 현재 문명을 만들어냈다.
전염병은 과거의 사례와 현재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늘어난 가축과의 접촉, 인구 밀집은 전염병이 성행하기에 완벽한 환경이다. 문명 하나가 없어질 정도이다. 면역체계라는 생물의 효율적 방어 체계에도 불구하고, 질병에 의한 영향은 인류사 판도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저자는 인간 사이의 지배구조에 대해 말한다. 사실 오래도록 인간은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다만 시기에 따라 형태가 달라졌을 뿐, 인류는 지배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까지도 말이다.
전쟁, 기후, 자원은 기술발전의 속도를 결정하는 세 가지 요소이다. 좋은 예시가 있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부족하다.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반도’라는 특성을 이용해야 했다. 반도라는 지리적 강점을 이용해 한민족은 살아남았다. 반면 지리적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서,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잦은 전쟁을 치렀다. 과거의 원인은 현재의 문화를 형성했으며 문화에 귀속된 국민의 생활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사례와 분류를 통해 문명 발전의 원인에 대해 엿볼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계기가 작건 크건 원인은 분명 존재했고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부, 인류사의 발전적 연구과제와 방향>
시간의 흐름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는데, 4장은 현대에 가깝다. 대륙에 따른 발전 양상에 대해 해석한다.
저자가 실제로 거주한 폴리네시아는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사회를 이루고 있다. 분명 환경적 요소, 즉 동식물이 인간에게 이용당할 여지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석기시대에 가까운 생활양식을 보인다. 이는 철저하게 고립된 환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심지어는 현재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더 이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역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그만큼 인류 역사를 연구하기에 좋은 수단이 된 것이다. 과거 문화양식을 현재에도 직접적으로 연구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보았다.
유라시아는 광활한 대지가 특징이다. 이는 인류가 마음껏 발전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 따라서 광범위적인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현재는 세계 경제나 환경을 좌우할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다. 유럽과 중앙아시아, 동아시아에 이르는 지리적 통합은 많은 경쟁을 낳았다.
만약, 아메리카에 스페인 침공이 없었다면 현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견해가 있다. 뉴기니와 비슷한 환경, 즉 고립된 특성을 가진 아메리카는 어떤 형태로든 자력으로 발전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한다. 풍부한 자원이 있고, 양쪽에 대양을 끼고 있는 아메리카는 지금의 미국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저자 에필로그>
글을 마무리하며 그간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몇 가지 인과관계를 소개해 두었다. 흥미로운 의견이 있었다. ‘왜 동양이 아니라 서양이 전 세계를 제패했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실증적 증거를 통해, 저자의 깊은 통찰로 이를 풀이했다.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었는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유럽은 개개의 국가가 각자도생을 목표로 수많은 경쟁을 통해 발전을 이루어냈다. 수많은 전쟁과 반목은 국가가 비만에 놓일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언제나 가난했기에 빈곤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동양 국가들은 하나의 국가, 즉 ‘통일’이 비교적 원만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도태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굳건하던 하나의 국가는 근대에 이르러 성장을 잊어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세계가 커짐에 따라 동서양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성장이 없었던 동양은 서양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리뷰 에필로그>
유력한 ‘가설’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글을 쓰며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었을까? 계기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에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스쳐 넘어갈 수도 있는 한 사람의 의견에 대해 깊은 통찰을 도출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떤 것일까. 인류사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당장의 내 주변의 관심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앞의 가족, 나아가 옆에 앉은 타인의 행동과 감정, 생각의 근원을 유심히, 아주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면 저마다 가진 개인의 역사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와 연결되니 말이다.
세 번을 읽었다. 처음은 두려웠고, 두 번째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읽을 당시에는 이 도서로 책모임을 열만큼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었다. 맥락이 유려하고 문장이 잘 다듬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준히 오래도록 잡고 읽기에는 꽤나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그마저도 텍스트에 녹이려니 양이 줄어들 수 밖엔 없었겠지만, 그래도 벽돌 책이다. 앞서 말했듯, 두려움을 벗어나 찬찬히 읽어본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완독 한다면, 내면에 큰 조각 하나 가 새겨진 기분일 것이다.
인류학, 사회학은 정답이 있을 수 없는 학문이다. 결국 판단은 개인이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실용적으로 쓰일지, 배경지식으로 사용될지는 이후 놓일 개인의 환경과 이에 따른 행동에 달려있다. 나는 이후 독서의 방향을 역사문화로 잡았고 오래도록 역사서들을 뒤적였다. 앞으로 나에게 놓일 환경에 나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