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에 대한 그런
한쌍의 눈과 귀, 하나의 코와 혀, 펼쳐진 피부는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감각이 둔해진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이며 감각과 극히 멀어진다면 죽음에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깊은 잠에 빠지는 인간의 행위는, 감각이 극적으로 무뎌지는 그 시점에서 인간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감각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죽음과 잠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대상이 죽어있다 판단하지 않는다. 다시 살려내기 위해 심장은 뛰고 열심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이윽고 오감이 살아난 인간은 감각 속 세상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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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감각이 필요하다. 하나의 개체는 삶을 추구한다. 스스로를 세계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불을 피하고 큰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자극적인 냄새에 숨을 멈춘다. 날 때부터 자연스러운 행위이기에 이런 행위가 어째서 자동화되어 있는지, 고통을 느끼는지 인간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당연함’에서 시작된 사유는 삶에 의구심을 부여한다. 동시에 감각으로 얻어진 그 어떠한 것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낸다. 살아온 나날 중 오감은 나에게 얼마만큼의 지분을 차지했는가. 오감이 자신을 얼마나 움직이게 했는가. 오감 없이 행동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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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은 종종 쾌락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 남용한다. 위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딱 거기까지만 발달한 인간의 감각은 만족을 위해 스스로 한계를 넘고자 한다. 감각을 남용하는 인간의 행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쟁(아곤)과 모의(미미크리), 운(알레아)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요한 호이징가는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 문화양식의 고착화 등의 단체를 이루게 된 이유를 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사유하고자 했다.
인간은 경쟁과 모의, 운을 상호 합의에 이루어지는 ‘놀이’로 여김으로써 스스로 감각 과잉을 경계했다. 놀이에서 벗어난 과잉행위는 종의 존속을 저해하기 때문에 규칙과 기록으로 이를 방지한다. 인간은 근대와 현대를 지나 비로소 신에게서 벗어나 인본주의적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계몽주의 효과로 인류는 이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요한 호이징가는 하나의 놀이 수단을 추가했다. 인간은 현기증(일링크스), 즉 감각 과잉을 통해 더 많은 쾌락을 누리는 놀이를 고안해냈다.
현기증(일링크스)은 감각의 역치를 낮추는 역할을 하는 도구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놀이기구, 마약과 포르노 등이 있다. 각각은 오감 중 두세 가지의 감각을 예민하게 느끼게 함으로써 사용자에게 깊은 쾌락을 안겨준다. 이례적인 기술 발달로 인간은 별다른 노력 없이 감각을 민감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손쉬운 달성은 개인에게 나태와 권태를 안겨주기 십상이다. 따라서 현기증의 남용은 개인과 집단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통제할 수 있는 국가적 약속, 법률로 이를 제재했다.
감각에 대한 인간의 규약. 자연스러운 본성의 억제가 우리네 인생에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과연 감각과 인식에 대한 체계는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정말로 보편적 요소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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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감각을 신뢰한다.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게임에 들어선다. 내가 본 것을 너는 어떻게 보는가. 같은 공간에 사는 우리가 맡은 냄새, 너와 나는 동일한 방식으로 인식할까. 같은 공간에서 발생한 파동은 우리는 달리 느낄까. 일단은 인간은 약속했다. 함께 살기 위해. 저 빛은 붉고, 저 냄새는 좋은 냄새이며, 저 소리는 부드러운 소리라 그렇게 약속했다. 다름을 인정하라지만 같다고 손을 맞잡은 인간의 행동 또한 자연스러운, 그리고 따듯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