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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Dec 23. 2021

방 정리를 하다.

정돈이 팔요한 이유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붉은 계열의 벽지는 집중을 저해할 수 있다고.


나는 서울 토박이다. 여러 번 집을 옮기긴 했어도 지금 지내는 집에서 십오년의 세월을 보냈다. 원래 나의 방은 푸른 벽지이다. 어머니는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사 오자마자 푸른색으로 도배를 했다. 뭐, 벽지 색과는 관계없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공간은 질풍노도한 마음에 어느 정도의 차분함을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아파트 전체로 보아 15층 완전 끝방이었기 때문에 방공기는 언제나 차가웠다. 차갑고 푸르고 높은 곳. 마치 초가을 하늘 위에 있는 듯했다.


충주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니 동생과 방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익숙지 않는 방에서 다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퇴사한 몇 주간은 집에서 잠만 잤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 어느 날, 잠에 드려는 순간 무언가 눈에 걸려들어왔다. ‘이 방 벽지는 분홍색이네.’


오랜 시간 푸른 방에서 생활해서 그랬을까 분홍색 방에 익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고 불안한 내 마음은 벽지 탓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방의 분위기 때문이라며.


오늘 갑자기 주변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꺼내고 넣으면서 먼지도 닦아내고 환기도 시켰다. 몇 년간 타지살이를 해서 그런가, 지금보다는 넓었던 그곳에서 데려온 물건들이 많았다. 반가움과 그리움, 그리고 오래된 향수도 발견되었다. 샘플을 공기 중에 칙칙 뿌려댔고 강력한 향기에 혼란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물건들이 구석에서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은 딱히 쓸 일이 없어 다시 포장해두었다. 방 정리에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꺼내진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잡동사니를 보이지 않게 숨겼다. 창을 열어놔 차가운 공기가 방을 채웠다. 땀도 나서 침대에 누워서 쉬던 찰나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와 대비를 이루는 내 방의 분홍 벽지까지. 창밖의 느긋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혼란한 방의 색깔.




정돈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은 탓할 것이 많다.


걷다가 돌부리에 넘어지면 정돈되지 못한 길바닥을 탓하듯, 탓할 거리는 제 마음에 따라 지목되기 쉽다. 그런 이유로 정리정돈은 주기를 두고 하는 것이 좋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번, 시간과 공간은 정리되어야 한다. 혼란한 생각이 금방금방 차오른다면 귀찮음을 이겨내 주변을 털어내야 한다. 사소함은 길에 쌓여 넘어질 거리를 제공하니 말이다.  내 마음대로 쓸어내릴 수 있는 것은 공간의 정돈뿐, 시간의 정리는 쉽게 닦아 없어지지 않는다. 마치 물에 살짝 젖은 먼지처럼.


정리되지 못한 시간을 정리하는 중에 스스로 등을 얼마나 후렸는지 모른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살라고. 가끔은 곪은 것이 터져 피가 흐르지만 갈라진 구멍은 메워지기 마련이다. 아픔이 가시면 다시 새로운 상처가 생기도록 때렸다. 지금은 아문, 수많은 상흔은 시간을 둔하게 했다. 조금은 어른에 가까워졌다.




여전히 분홍 벽지는 거슬린다. 그렇다고 다 뜯어내고 다시 도배하기에 혼란의 추억이 어쩐지 아깝게 느껴진다. 그저 두고 더 많은 먼지가 고르게 쌓일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겠다. 쌓인 책들이 벽을 가리고 가져온 옷가지들이 보이는 면적을 줄이겠지만 그래도 밤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전등을 꺼버리면 잠이 들기에 그렇게 편한 곳은 없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정돈해야겠다. 지내다 보면 다시 엉망이 되어버릴 걸 알면서도 방을 닦고 먼지를 닦아낸다. 매번 공간을 정리하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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