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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May 14. 2019

혼자 사는 삶의 타임라인

얼마 전 국민연금공단에서 보낸 우편물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총 몇 회의 국민연금을 납부했고, 앞으로 몇천 번을 더 납부하면 65세가 되어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안내문이었다. 지금까지 낸 납입 횟수에도 깜짝 놀랐는데, 앞으로 내야 할 횟수를 보고는 정말 아득해졌다. 국가여, 나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안내문을 받은 날, 나도 모르게 구글에 ‘국민연금 안 내는 법’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만약 당신이 회사원이라면 애석하게도 그런 방법은 없다. 최근엔 수령 나이를 65세에서 68세로 높이는 정책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까지 나온다. 월급 명세서에서 이미 빠져나갔다는 숫자만 확인할 수 있었던 나의 납부액은 모두어디로 갔을까.      


첫 회사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선배가 소개해준 재정 설계사를 만나 상담을 받았다. 20대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그분은 자리에 앉자마자 재정 설계를 하려면 인생 설계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옳은 말이었다. 





앞으로 인생에서 목돈이 들어갈 일은 결혼이거든요.
결혼을 몇 년 후에 하실 계획이세요?

보통 남들은 결혼을 몇 살에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건가. 나는 그런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는데. 당황한 나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노련한 재정 설계사님은 “독립으로 계획을 세우시는 분들도 계세요”라고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었다. 물론 독립도 계획을 전혀 세운 적 없었지만, 결혼 이외에 다른 목표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안심이 됐다. 그분은 내 작고 귀여운 월급을 쪼개서 넣을 수 있는 적금, 저축, 펀드, 보험 등 다양한 인생의 안전망을 설계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장 5년 뒤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내게 대부분의 투자는 기약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인생 계획이 없었던 나에게 재정 계획을 세우는 일은 몇 배로어려웠다. 지금도 나의 재정 계획이 부실한 건 다 인생 계획이 제대로 안 서 있는 탓인 것 같다. 하루 단위, 1주일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면서도 설계사가 말하는 ‘결혼하여 내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 교육비를 고민하는 인생’이 아닌 ‘혼자 사는 삶’의 타임라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      


혼자 살고 있고, 잘 지내요.


이렇게 말하면 “지금은 젊어서 괜찮지”라는 말이 돌아올 때가 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날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죠, 뭐” 하고 웃으며 넘기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는 날은 ‘늙어서 두고 보자는 거야, 뭐야’ 배배 꼬인 생각이 든다. 30대 여성이 혼자 살다 보면 노년에 어떻게 될까? 그냥 누구나 그러하듯이 혼자 사는 평범한 할머니가 된다.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가지만, 혼자 사는 여성의 미래는 대체로 어둡게 그려진다. 기업의 구조조정 시, 비혼 여성은 ‘책임져야 할 가정이 없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제1순위로 정리되고, 형제자매 사이에서 역시 ‘보살펴야 할 가정이 없다’는 이유로 늙은 부모를 돌보는 책임자가 된다. 직장에서 받는 연봉조차 애초에 남성보다 적게 받는데, 40대, 50대로 갈수록 그 격차는 더 커진다.


국민연금 수령 여부는 미지수고, 복지 혜택을 받을 날도 요원해 보이는데, 지금은 젊으니까 괜찮을 뿐이라고 속삭이는 어둠의 목소리까지 듣는다. 이때, 유일하게 희망을 주는 건 혼자서도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흠모하는 주변 여성들, 호감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지켜보는 여성들은 이 모든 불안을 안고 있음에도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돕고, 멋지게 요리를 하고,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떠나고, 유머를 잃지 않는다. 자주 여행을 함께 떠나는 가까운 친구와 언젠가 ‘생활 동반자법’이 통과되면 한 집에 살거나 가까운 곳에 살며 노년을 함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혼자 살기가 계속된다면 불안을 웃음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새로운 삶의 동반자가 되지 않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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