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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May 07. 2019

내가 만든 진짜 ‘여성 안심 귀갓길’

연신내 집을 처음 보러 간 시간은 평일 저녁이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어두컴컴하다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길이 어둡다고 생각하면서도 집을 구하는 나의 여정이 더 어두워 보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사하고 난 후, 그 길에 빛이라고는 해방 직후 설치한 것 같은 흐릿한 주황빛의 가로등 두세 개 뿐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렇게 어두운 밤길을 일정량의 두려움을 안고 오가는데, 바닥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 갑자기 화가 났다.



‘여성 안심 귀갓길.’


집에 가는 길, 닿는 발길마다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아, 이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란 말인가? 별다른 조처도 없이 ‘여성 안심 귀갓길’이라고 써놓으면 안심이 되나?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따로 없었다. 서울시에서 말하는 ‘여성 안심 귀갓길’이란 무엇일까? 서울시 다산콜센터 블로그에 따르면 ‘여성 안심 귀갓길’은 버스정류장이나 역에서 주거지까지 방범 시설물 설치 등 주변 환경 개선을 통해 안전을 확보해주는 길이다.


설명을 더 자세히 읽어보면 전봇대에 SOS벨, 위치 번호 등 여러 방범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는데 어두컴컴한 길을 불안에 떨며 걸으면서, 비상시에는 전봇대를 향해 달려가라는 뜻인 것 같다. 물론 위험 상황에 전봇대 위치와 SOS벨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말이나 말지, 매일 여성, 안심, 귀갓길이라는 글자를 밟으며 안심하지 못하는 귀갓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지리산 근처 어느 마을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폐교 하나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게 안타까워서 해당 지역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다고 했다. 세상에, 자기 동네도 아니고, 여행 간 동네가 아름다워서 민원을 넣는 사람이 있다니. 그게 내 친구라니. 놀라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는데, 해당 교육청의 처리도 놀라웠다. 별도로 여러 번 연락을 하면서, 해당 폐교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는 게 아닌가. 친구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지리산 마을을 위해서 민원을 넣는데, 난 매일 오가는 길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 이 깨달음은 나를 난생 처음 구청 홈페이지의 민원 게시판을 찾게 했다.


민원 게시판에 글을 쓰려면, 우선 본인 인증을 해야 한다. 휴대폰 번호로 인증을 하고, 개인 정보를 입력해야 글을 쓸 수 있다. 번거롭지만 의견을 개진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여성 안심 귀갓길’이지만 전혀 안심할 수 없는 길 사정에 대해 민원 글을 작성했다. 글을 올리면 게시판에 미접수, 처리 중, 처리 완료로 진행 상황이 표시된다. 대부분 비밀글로 작성하지만, 공개된 민원을 읽어보면, 정말 다양한 애로사항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처리 중에서 처리 완료로 바뀌는 데 적어도 사나흘은 걸리는 것 같아서 그후에 다시 사이트를 방문해보았다. 여전히 내 글은 ‘처리 중’이었다.


‘역시 가로등을 바꾸는 번거로운 작업은 대충 넘기려는 거겠지?’

불신을 가득 안고 1주일을 더 기다렸다. 다시 방문한 게시판에는 드디어 ‘처리 완료’ 표시가 되어 있었다. 답변을 보려면 다시 본인 인증을 해야 한다. 휴대폰 번호로 다시 인증하고 확인한 글에는 허무한 답변이 달려 있었다. 내가 말하는 길의 위치가 어딘지 몰라서 개별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연락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1주일이나 걸려서 받은 답변이 이거라니, 허탈했다. 무엇보다 개인 연락처로 이메일 주소를 남겼는데, 메일로는 아무 연락도 없었기에 더더욱 맥빠졌다.


네이버 지도와 그림판을 열어 지도를 캡처하고, 그림판에서 빨간 선으로 구불구불 길을 그려나갔다. 다시 인증하고, 지도를 첨부하고, 민원글을 작성했다. 친구들은 구청에 민원을 넣어서 가로등을 설치하겠다는 나의 야심 찬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 ‘아마 안 된다고 할 거야, 그럼 온 동네에 다 설치해줘야 되잖아’, ‘공무원들이 그런 일을 해줄 리 없어’ 등등…. 1주일 후에 다시 구청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내 글 옆에 ‘처리 완료’ 표시가 있었다. 답변은 ‘실제로 가서 확인해보니, 길이 어두웠다. 곧 가로등을 설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만세! 가로등을 설치해준다잖아! 하지만 아직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긴 일렀다. 그 글에는 결정적으로 언제 설치하겠다는 내용이 없었다. ‘처리 완료’가 되기까지 2주일이 걸렸는데, 가로등이 언제 설치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리 완료’ 답변을 받은 지 이틀이나 지났을까.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LED 가로등이 양옆으로 환하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 요즘 설치되는 LED 가로등이 얼마나 밝은지 아시는지. 길 양옆에서 비추면, 지나가는 사람의 모공 속까지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처럼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탭 댄스를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친구들은 나의 성공담(?)을 놀라워하며 들어주었다. ‘여러분 주변 환경은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회를 바꾸는 건 개개인입니다!’ 친구들에게만 자랑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길 가는 동네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내가 가로등을 설치했다고 외칠 뻔했다.


지금도 LED 가로등은 반짝반짝 빛난다. 이제 ‘진짜 여성 안심 귀갓길’이 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또다시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혹시, 저 가로등 누가 설치했는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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