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정 Apr 30. 2019

혼자 살면 남자들이 좋아한다면서요?


혼자 산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남자들이 좋아하겠네”이다. 내가 혼자 사는 것만으로 인류의 절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저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나의 인기가 혼자 사는 것으로 (비로소) 높아진 것이 너무나 기쁜지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 미소의 뜻을 알고 있지만, 알고 싶지 않아서 애써 무시하고 침묵하면 내가 중대한 진실을 외면한다는 듯 “왜, 남자들 이상형이 자취하는 여자잖아”라는 말을 굳이 덧붙인다. ‘아, 남자들의 이상형이 되는 방법도 모르고 30년을 넘게 살았다니, 지난 생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반응을 기대하는 걸까.     


여자가 혼자 살면서 매일 의식해야 하는 건 날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남자의 호의가 아니라, 혼자서 모르는 남자와 마주치는 상황에 대한 공포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남자가 술에 취한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가겠지? 배달 음식 시키면 혼자 사는 여자 집을 체크해둔다는데, 설마 안 그러겠지? 보일러 고치러 기사가 밤 9시 넘어서 온다는데 친구한테 미리 연락해놓으면 괜찮겠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고 해도, 이사를 하게 되면 ‘남자’들의 방문이 잦아진다. 이사 업체, 도시가스 설치 기사, 보일러 점검 기사, 인터넷 설치 기사 등등 여러 낯선 남자들의 방문을 피할 길이 없다.      


그날 방문한 남자는 가구 설치 기사였다. DIY 가구를 구입했지만, 먼저 구입한 친구가 꼭 설치 옵션을 선택하라고 해서 ‘설치 기사 방문’을 체크하고 추가 비용을 미리 지불했다. 가스 설치처럼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친구가 집에 놀러온다는 토요일로 방문 일자를 잡았다. 설치 기사가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주문이 밀려 빨리 처리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친구랑 같이 있을 때 오시면 좋을 텐데, 생각했지만 무거운 가구를 싣고 오는 사람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설치 기사가 집에 들어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둘러보더니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신혼집은 아닌 거 같고 혼자 사는 거 같은데…. 혼자 살죠?” 


등 뒤에 식은땀이 났다. 낯선 남자와 단둘이 집에 있는데 ‘혼자 살죠?’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밀려오는 공포에 온몸이 굳었다. 아니라고 해야 하나, 맞다고 해야 하나, 맞지만 아니라고 해야 하나. 삼지선다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SNS에서 봤던 ‘혼자 사는 여자 생존법’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자 신발을 사서 현관에 둬라, 벽에 남자 경찰 사진을 걸어 둬라 등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던 모든 생존법이 예시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떠올랐다. 밀랍 인형처럼 굳은 나를 보더니 자기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내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자 혼자 사는데 왜 넓은 데 살아요?” 

‘넓은 데’라니? 나도 모르게 굳은 몸을 돌려, 집을 둘러봤다. 낯선 사람이 현관에 서서 얼핏 보기만 해도 혼자 사는지 둘이 사는지 살림살이 파악이 단번에 가능한 이 집을 두고 하는 말이 맞나. 혹시 설치 기사 눈에만 다른 VR이 펼쳐지고 있나. 말문이 막혀 멍하게 있다가 나도 모르게 생존용 미소를 띠며 뱉을 필요가 없는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하…. 동생도 가끔 와서 자고 가서요.” 


그는 내 변명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가구를 들고 방에 들어갔다. 그러곤 가구를 조립하기에 방이 너무 좁다며, 방 안에 있는 살림살이를 밖으로 치우라고 했다. 여자 혼자 살기엔 과분하게 넓지만 가구를 넣기엔 너무 좁은 아이러니한 방에서 나는 정신 없이 살림살이를 부엌으로 날랐다. 마동석 님은 100평대에 혼자 살아도 이런 말을 한 번도 못 들어보겠지만, 혼자 사는 여자는 현관에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설치 기사가 집을 떠나고, 나는 분노하여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고, 친구들은 가구 회사에 컴플레인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내 주소, 연락처, 얼굴을 아는 사람에 대한 컴플레인을 적극적으로 하기 두려워서 하지 않았다. 여자 혼자 살기에 적당한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그 적당함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남자가 정해줄 수 있는 걸까. 오늘도 택배 메모란에 ‘벨 누르지 마시고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를 적고, 배달 음식은 주소를 다 쓰지 않고 ‘현관에서 전화 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기며 그날의 분노를 떠올린다. 혼자 살면 남자들이 좋아하겠다고요? 아, 네….     

이전 06화 불효자는 잘 지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