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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Apr 23. 2019

불효자는 잘 지냅니다

어버이날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된 건 우리 집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웬만해서는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대로라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면서도 일정 부분은 미루어 짐작하는 데 익숙하다. 엄마가 받으면 기뻐할 선물이라니, 그건 차라리 어떤 수수께끼에 가깝다. 나는 내기나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 안전제일주의형 인간이라 기념일에는 무난하게 현금을 건넨다. 남동생은 어떤 쪽이냐면, 그래도 자신 있게 베팅을 하는 쪽이다. 올해는 엄마에게 여행지에서 산 가죽 가방을 선물했다. 동생의 베팅은 거의 매번 엇나가는 듯한데, 엇나감 역시 짐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올해 엄마 생일에는 엄마가 항상 쓰는 기초 화장품 세트를, 어버이날에는 현금을 드렸다. 어버이날 즈음, 엄마 집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나에게 엄마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엄마는, 네가 괜찮은 남자 데려오는 그런 선물을 받고 싶어.”


다시 말하지만, 우리 집안은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다. 침묵이 흐르면 흘렀지, 결혼 이슈는 단 한 번 언급된 적 없는데, 어버이날 특별 사면 카드를 들고 있다는 듯이 엄마가 말을 꺼냈다. 나는 그냥 “엄마, 내가 진짜 데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큰일 나”라는 농담으로 웃어넘겼다.     

엄마는 30대 중반에 혼자 사는 큰딸과 결혼에 관심이 없는 작은딸을 볼 때마다, 우리 딸들은 왜 그럴까 궁금하고 답답한 눈치다. 아무리 현시대의 비혼율과 주변의 혼자 사는 여자들 이야기를 들려줘도 엄마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의 젊은 엄마가 말수도 적고 달콤한 말 같은 건 한마디도 못했을 아빠를 따라 고향을 떠나기로 한 마음이 뭘까 짐작 가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 있지? 어떻게 더벅머리 남자만 믿고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과 친구들을 떠나 낯선 도시에 살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항상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옛날엔 다 그랬어’라고 대답한다. 옛날 여자들 백 명 중 아흔아홉 명이 그랬어도, 지금의 나와 데칼코마니처럼 생긴 엄마가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160cm에 40kg 정도밖에 안 되는 작고 마른 여자가 낯선 도시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엄마는 결혼하지 않는 내가 엄청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결정에 비하면 나는 차라리 아무 선택을 하지 않은 편에 가깝다.     

완전히 지쳐 집에 돌아와서 밥 차릴 힘도, 씻을 힘도 없어 외출복 차림 그대로 한참을 소파에 누워 있을 때가 있다. 나의 엄마는 이렇게 지치는 날에도 대가족을 돌봤다. 나는 나 하나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엄마, 난 나 하나 챙기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우리 셋을 키웠어?”

엄마는 이 질문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너희 키울 때가 제일 행복했어.”

엄마는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이 작은 여자가 나를 키웠다. 얼굴도, 키도, 체형도, 우리는 모두 비슷하니까 아마 그 씩씩함도 내 몸 어딘가에 들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힘으로 날 잘 먹이고, 키우고, 돌봐야지. 좋은 결심이긴 한데, 엄마가 바라는 방향은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엄마, 불효자는 오늘도 잘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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