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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Apr 16. 2019

인생의 동지가 필요할 때

퇴근 후, 동네 마트에 들렀다. 주로 사는 물품은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어슬렁거리며 반조리 식품 코너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와 진열대 사이로 팔 하나가 쑥 들어왔다. 깜짝 놀랐다. 가족과 장을 보러 나온 남자였다. 그는 내 앞에 있던 곰탕 반조리 식품을 들고 아내에게 매달렸다. 

“이거, 이거 하나만 사자, 응?” 

‘비비고 곰탕이라….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맛있나’ 생각하는데,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이거 ○○(아마도 안고 있던 아이의 이름)이는 못 먹인단 말이야.”

그 말에 바로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안 돼, 더 힘을 내요. 어차피 곰탕은 2인분인데 어른들끼리 먹고 아이는 다른 거 먹으면 된다고 해요!’ 

내 마음속 응원이 들리지 않았는지 남자는 곰탕을 내려놓고 터덜터덜 돌아갔다.



혼자 살면 다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인생의 동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조리 곰탕을 사는 것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결정들, 예를 들자면, 에어프라이어를 살지 말지 같은 선택 말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기기의 유혹을 잘 넘겨왔다. 작은 오븐이 있다면 피자빵도 해 먹고, 토스트도 해 먹고 정말 유용할 것 같았다. 발뮤다 토스터도 그렇고,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오븐들은 집에 두기에도 예쁠 것 같았다. 

‘이미 토스터기는 있는데, 몇 번이나 쓰겠어.’ 

집에서 요리하는 횟수를 생각하다 그만뒀다. ‘자이글’은 또 어떤가. 고기를 한번 구우면 냄새가 1박 2일 빠지지 않는 환기 안 되는 집에서 냄새와 연기 없이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신박한 물건이라니. 생긴 건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목살을 집에서 편하게 구워 먹을 수 있다니, 엄청난 기계였다.

그런데 집에서 고기를 몇 번이나 구워 먹겠나 싶어 그것도 그만 뒀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남들 집엔 다 있는데 우리 집에만 없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더하면 아포가토가 된다.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도, 라테도 실컷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넌 커피라도 사러 집 밖에 좀 나가야 한다는 친구의 말에 마음을 접었다. 겨울이 됐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군고구마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계절이다. 고구마를 구워주는 기계라니, 눈이 돌아갔다. 친구는 자기가 산 물건 중에 제일 잘 산 물건이라고 했다. 이거야말로 우리 집에 있어야 하는 제1의 가전제품이었다. 하지만 역시 나 혼자 먹을 수 있는 고구마 개수를 생각했다. 매일 군고구마를 굽는 동네 카페에서 사다 먹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그런 나에게 에어프라이어가 다가왔다. 에어프라이어의 전지전능함을 간증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삼겹살도 구워 먹고, 소고기도 구워 먹고, 감자튀김을 해 먹고, 군만두도 해 먹고, 치킨도 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세상에, 모두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 기기야말로 못하는 음식이 없다. 에어프라이어를 산 친구 집에 놀러갔다. 친구는 심지어 김말이 튀김을 해줬다. 친구 냉동실에서 김말이가 나올 때, ‘네가 왜 거기서 나와’의 심정이었지만 에어프라이어에서 나온 갓 튀긴 김말이는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쓰게 될까’ 마음에 걸렸다. 튀긴 음식을 잘 먹는 편도 아닌데, 에어프라이어를 사서 온갖 걸 다 튀겨 먹는 게 과연 건강에 좋을까? 친구가 추천해준 모델명도 있고, 용량도 정했고, 구매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고민이 됐다.


이럴 때 바로 인생의 동반자가 필요하다. 나 대신 에어프라이어를 꼭 사고 싶어 하는 동지가 있다면, 그 핑계를 대며 살 수 있지 않나. 만약 에어프라이어가 예전에 샀던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처럼 자리만 차지하며 멀뚱히 날 바라볼 때에도 “네가 사자고 했잖아”라고 간편한 핑계를 대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필요했다. 혹은 나 대신 에어프라이어를 몇 번 돌리다 싫증을 내줘도 좋겠다. 결국 에어프라이어는 아직 사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맥주 한잔에 감자튀김을 곁들이려면 소소하게 에어프라이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에어프라이어는 내 장바구니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싱글들은 언제 제일 결혼하고 싶냐는 질문을 영원히 받는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그러니까 한 국가의 수장이거나, 영웅이거나, 대단한 그 무엇이라고 해도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돌아갈 단 하나의 질문은 정해져 있다. 

“언제 제일 결혼하고 싶으세요?” 

나라고 피할 수 있겠나. “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고 어두울 때”라는 대답을 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그보다는 장바구니에 잠들어 있는 에어프라이어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더 솔직한 대답이 될 것 같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에어프라이어로 감자를 튀기는 일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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