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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Apr 02. 2019

바 선생이 나타났다!

어두운 새벽이었다. 그들 중 하나를 처음 만난 건. 해외 출장을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몇 시간은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졸린 눈으로 더듬더듬 욕실 불을 켜고 샤워를 하러 들어간 자리에, 그가 있었다. 바퀴벌레.



체감상 거의 내 몸만 한 크기의 그가 바닥에서 또렷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엄청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청각이 없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욕실 문을 사이에 둔 대치 상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조용히 욕실 문을 닫았다. 싱크대에서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도 감지 않은 채 공항으로 서둘러 떠났다. 이제, 나의 낡고 작은 이태원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인 것이다. 전세 계약 같은 인간의 약속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날 집을 잃었다.


해외에서 며칠을 보내다 오니, 놀랍게도 그 사실이 잊혔다. 나만한 그와 만났다는 사실, 이제 그들이 내 집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나조차도 의심했다. 

‘아주, 정말, 우연히, 어쩌다가, 한 마리 만났을 뿐이야. 내가 해외 출장을 다녀왔듯이, 그도 잠깐 여행을 온 거랄까. 이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살던 몇 주 후, 다시 그가 나타났다. 마치 나의 안일함을 비웃듯이 이번에는 욕실도 아닌 옷방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문을 닫고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타고 떠날 비행기가 없었다. 한밤 중 괴성을 질렀지만, 이웃 중 누구도 경찰에 신고를 해주지 않았다(동네의 치안이 심 히 걱정됐다). 옷방 문을 닫고, 그들이 자비를 베풀어 침실만은 들어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인터넷에 올라온 남들이 쓴 ‘바퀴벌레 박멸 일지’를 읽었다. 


다들 정말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장 간편해 보이는 방법은 그들의 천적, 세스코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내 나이보다 오래된 주택 한편에 세 들어 사는 나에겐 최후에 고려하고 싶은 선택지였다. 세스코 없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자들의 노하우가 담긴 포스팅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들이 가장 추천하는 무기는 ‘맥스포스 셀렉트겔’이었다. 간혹 승리의 기쁨에 취한 정복자들이 게시글에 그들의 모습을 찍어 올리기도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으며 정보를 수집했다. 지금도 제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검색했다가, 또 한 번의 데미지를 입었다. 


덫처럼 먹고 그 자리에서 죽는 약은 싫었다. 그랬다가는 그들의 사체를 볼 수도 있으니까. 셀렉트겔은 그걸 먹고 둥지로 돌아 가서 동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집 안 틈새에 뿌려두면 해충을 흥분시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스프레이 약 ‘비오킬’도 사서 함께 뿌렸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이런 모든 조치를 조롱이나 하듯이 그가 침실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에도 체감 크기는 나와 동등한 수준이었고 아무리 작게 보고 싶어도 스타벅스 커피잔만 했다. 이번엔 문을 닫고 나가 버릴 수가 없었다. 침실만은 사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손에 잡히는 스프레이를 뿌렸다. 용감하게 맞선 나의 손에 들려 있었던 건 해충을 흥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비오킬이었다. 그 말은 즉 당장 그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는 나의 공격에 더 자극을 받아 날개를 펼쳐 날기 시작했다. 세상에, 잠은 꼭 집에서 자야 할까? 이제 내 집이 아닌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이 집을 넘기고 떠나야 할 때가 아닐까? 잠시 고민하다가 집을 내줄 땐 내주더라도 내 몸에 닿지 않게 하려면 지금 그를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 부엌으로 뛰어가 락스 스프레이를 집어 분사했다. 락스가 몸에 닿자 비상하던 그는 날개에 힘을 잃고 떨어져 죽음을 맞이했다. 두루마리 휴지 5천 겹을 말아 잡아서 변기 안에 넣고 물을 내렸다. 


그날 이후, 그들 사이에 ‘마주치면 소리를 지르며 목숨을 위협하는 세입자가 있다’는 풍문이 돌았는지, 아니면 곳곳에 설치해놓은 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들은 자취를 감췄다. 이 모든 에피소드가 다시 생각나는 이유는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약 8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들의 친척쯤으로 추정되는 벌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인가…. 아직 약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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