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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Mar 26. 2019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사 수난기

전셋집 구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마음에 쏙 드는 전셋집을 구하기란 정말 어렵다. 하지만 그 일을 완수한다고 해도,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바로 ‘이사’다. 이사는 생각하기만 해도 긴장되는 단어다. 2년에 한 번 꼴로 해야 하는 이사를 생각하면 이게 다 내 집이 없어서 겪는 일이라는 비통함까지 밀려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믿기지 않지만, 나는 이제 혼자 사는 30대 어른이고, 하루 놀다 들어오면 엄마 아빠가 이사를 마쳐놓는 그런 나이가 지났다.



이사 전날, 업체 사장님에게 문자가 왔다.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려서 걱정이다, 시작 시간을 12시로 미뤄도 되겠느냐는 문자였다. 눈 오는 날 이삿짐을 나르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몰랐던 나는 사장님의 고충보다 이사 가는 동네에서 처리할 일이 산더미인 내 고충만 걱정됐다. ‘11시는 안 될까요? 눈이 많이 오면 다시 연락 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고 걱정 속에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생각보다 눈이 많이 안 와서 9시에 맞춰 오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집 밖으로 나가보니, 눈이 많이 쌓인 건 아니었지만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살포시 덮여 있었다. 다들 눈 오는 날 이사를 가면 잘된다는 덕담을 해줬지만, 큰 위로가 되진 않았다. 눈 오는 날 이사가 얼마나 어려우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건네기 시작했을까.


당연하게도 마지막 날이니까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했다. 이사 올 때 내가 보증금을 어떻게 냈겠는가. 몇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당연히 집주인 통장으로 계좌이체했다. 그런데 본인이 오늘을 위해 틈틈이 현금으로 준비를 해두었다며, 현금을 꺼내는 게 아닌가. 얼마는 새마을금고, 얼마는 하나은행, 얼마는 무슨 은행에서 인출했다는 나에겐 전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며, 부동산 사무실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지금 이삿짐을 나르는 걸 지켜볼 시간도 부족한데, 사무실에 앉아 몇천만 원을 세야 하는 건가. 수표, 5만 원권, 1만 원권이 뒤섞인 돈다발을 보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걸 오늘 현금으로 주시면 어떡해요.’ 볼멘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하나하나 세야 했기 때문에 그럴 정신이 없었다. 정말 이 큰돈을 타인과 현금으로 세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돈을 세고 나서도 그 돈을 가방에 넣어서 들고 이동하려니 불안했다. 정말 잘 셌는지 확인도 할 겸 곧장 동네 은행에 가서 돈을 입금했다. 다행히 돈은 맞았고, 무사히 내 계좌에 들어갔다. 물론 내 정신은 빠져나갔지만.


자, 나는 드디어 떠나왔다. 돈을 일일이 손으로 셌지만 결국 은행에 넣었고, 이삿짐 트럭에 집주인 할머니도 싣지 않은 채 무사히 새로운 동네에 도착했다. 이사 온 집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울 일은 없었다. 그저 내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대충 짐을 풀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사 업체 사장님들께 점심값을 드리고 (통상 점심은 같이 시켜 먹거나 점심값을 드린다) 동네로 들어오는 길에 본 맥도널드로 향했다. 멍하니 앉아 햄버거를 씹고 커피를 뇌에 부으며 오후에 할 일을 생각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 신고를 해서 확정 일자를 받고, 잔금을 송금하고, 부동산에 가서 계약을 마무리 지어야지.’ 햄버거 가게를 나와 동사무소로 향했다. 이제 서류상으로도 새로운 동네의 일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세 보증금 잔금을 송금하면 된다.


사장님들이 부지런히 이삿짐을 나르시는 동안 방구석에 서서 휴대폰으로 송금을 시도했다. 오로지 이삿날을 위해 1일 송금 한도를 늘려놓아서, 무리 없이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영하의 날씨는 패딩을 입고 서 있어도 한기가 올라왔다. 전 재산을 터치 몇 번으로 타인에게 보내는 건 영하의 날씨보다도 오싹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의 돈은 뭔가 더 형식을 갖춘 거래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 원목 책상에 앉아 만년필로 사인이라도 해야 하는 그런 거래가. 이런 나의 진지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의 은행 앱은 계속 송금에 실패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돈이 있는데 보내질 못하니! 어차피 부동산에 가야 하니 부동산 옆 은행에 가서 송금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은 여차하면 문을 일찍 닫는 곳이다. 서둘러 은행으로 갔다. 은행 ATM에서도 송금을 실패했다. 오늘 내가 이사하는 날인 걸 은행에서 알고 이렇게 날 애먹이는 걸까. 불안했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려 직원과 이야기했다.

“계좌에 돈이 있는데, 송금이 안 되어서요.”

“혹시 오늘 수표로 입금하셨어요? 수표로 입금하시면 계좌에는 표시가 되는데 다음 날 찾으실 수 있으세요.”

아… 손으로 세고 또 센 돈을 모두 은행에 맡겼는데 수표는 당일 출금이 안 된다는 걸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표는 그대로 가져왔을 텐데.

“그럼 어떤 방법이 있죠?”

“다음 주 월요일에 찾으실 수 있으세요.”


이사한 날은 금요일. 집주인에게 ‘덕분에 오늘 이사는 잘 했는데, 돈은 이틀 후에 주겠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짐들과 집주인과 부동산 사장님의 얼굴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선 부동산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수표를 입금시키고 왔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우선 송금해드릴 수 있는 돈은 모두 송금했다. 내 통장에 이만큼 돈이 있으니 월요일에 드릴 수 있다’고 통장 잔고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부동산은 부동산대로 심각해졌고, 집주인은 부동산으로 달려왔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내 표정을 보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집주인은 긴 망설임 끝에 알겠다고 월요일에 입금하라는 말을 남기고 부동산을 떠났다. 미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부동산은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눈치였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점잖은 부동산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저기… 직장은 있으신가요?”

‘혹시 아니겠지만 네가 사기꾼은 아니겠지, 정말?’ 확인받고 싶은 눈치였다. ‘직장인도 사기를 친답니다, 사장님’이라고 농담할 기운도 없었다. “네, 직장 있고요. 제가 정말 오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액수의 현금이랑 수표를 받고 정신이 없어서 일어난 일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월요일에 잔금을 송금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천만다행인 건 이사 온 집이 빈집이어서 나에게 돈을 받고 나가야 하는 세입자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집주인이 더 불안했겠지만 나도 주말 내내 마음이 불편할 터였다.

이 모든 일을 힘겹게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이번 이사에서의 유일한 구세주 이삿짐센터 사장님들이 집을 반짝반짝 정리해놓고 계셨다. 이전의 내 집보다 더 깨끗하게 수납하고, 스팀 청소기로 바닥 물청소까지 해주시는 꼼꼼함에 감탄했다.

“원래 제가 정리한 것보다 훨씬 좋네요.”

이분들이 없었으면 정말 어쩔 뻔했을까.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제 드디어 내 집에 나 혼자 있게 되었다. 전 집주인의 돌발행동과 기초 상식 부족으로 아직 치르지 못한 잔금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지만, 어쨌든 나는 옮겨왔다.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나만의 이사를 마쳤다. 이쯤에서 이사 온 집에서 따뜻한 코코아나 마시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보일러를 틀고 떨면서 기다려도 도무지 집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아서일까, 계속 기다려도 바닥은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기꾼으로 의심받는 주제에 용기를 내어 부동산에 연락했다. 부동산 실장님과 집주인 아주머니가 함께 왔다. 보일러 A/S 기사에게 연락해두었다며, 오늘 밤에 불이 안 들어오면 아가씨 밤에 추워서 어떡하냐고 찜질방에라도 가야겠다며 걱정하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사 온 첫날 찜질방에 가게 생겼는데 지금 집주인한테 따지지는 못할망정 울 땐가. 하지만 하루 종일 지친 마음은 작은 다정함에도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이사 첫날을 찜질방에서 보내는 정도의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히 그날 밤 보일러를 고치고, 따뜻하게 잠들면서 하루를 마쳤다. 이사가 끝난 따뜻한 집에서 코코아를 마신다니, 그날의 이사는 보드카를 병째 마시는 편이 더 어울린다. 이 일을 2년마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아, 정말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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