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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May 21. 2019

조용하고 다정했던 작은 집아, 안녕

© 김보리


두 번째 나의 집, 연신내 집으로 이사 온 첫날밤 똑같은 침대에 똑같은 이불을 덮고 잠드는데 무언가 달랐다. 사방이 너무나 조용했다. 이태원 집도 시끄럽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번화한 동네의 큰길가여서 일상 소음이 많았나 보다. 그에 비하면 두 번째 집은 지리산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적막이 가득했다. 작은 빌라라 윗집이나 옆집이 시끄러워도 그러려니 하고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은 집은 저녁이 되면 고요해졌다. 지리산을 생각하며 잠든 첫날 밤부터 난 이 집이 좋아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 집을 좋아했던 이유는 집을 사람으로 치면 내 기준에서 상식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남향이 아니라 햇볕이 내내 잘 드는 건 아니지만 아침이면 적당히 빛이 들었고, 바닥은 새로한 장판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색의 마루라 깨끗하게 쓸 수 있었다.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다용도실이 따로 있었고, 그곳에 보일러도 있었다. 바로 앞에 건물이 없어 창을 마주한 이웃 때문에 불편할 일도 없었다. 외풍이 셌지만, 보일러가 잘 돌아갔고, 가스 요금을 내는 만큼 따뜻했다. 항상 광고지가 쌓이긴 했지만 우편함이 따로 있었고, 친구가 운전해서 오면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이웃들이 가끔 시끄럽게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담배를 피우긴 했지만 크게 불편한 일은 없었다. 이 정도 상식적인 집을 구했던 게 너무 기뻤던 나머지, 나는 친구들에게 계속 우리 동네로 이사 올 것을 권했다. 마지못해 집을 보러 온 친구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영업에 실패하고 내가 먼저 떠나게 됐다.   

  

이 집의 좋은 점, 나쁜 점을 2년 동안 속속들이 알게 됐는데, 딱히 말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에어비앤비 집주인이 집 사용법을 담은 노트를 남기듯이 이전 세입자가 다음 세입자에게 집이나 동네에 대한 설명이 담긴 문서를 남긴다면 또 모를까. 집주인과 부동산이 말해주지 않는 최후의 진실 같은 것. 이 집의 좋은 점은 살다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대비가 필요한 단점들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사계절 내내 습하니 가습기는 필요 없지만 제습기가 필요할 거라는 조언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피어날지 모르는 곰팡이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 이 집의 방 하나는 곰팡이 제거제로 곰팡이를 제거했지만, 이삿짐을 모두 빼고 나서야 다른 방에도 곰팡이가 숨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동네도 미리 알면 좋을 정보들이 많다. 어느 빵집의 빵이 제일 맛있는지, 샌드위치는 어디서 사야 하는지, 집 앞 카페는 뭐가 제일 맛있는지,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면 어디가 별로고 어디가 추천할 만한지, 맥주 한잔 하기 좋은 곳은 어디인지, 동네에 세탁소가 많지만 그중 추천하고 싶은 세탁소는 어디인지. 옷을 맡길 때마다 이름을 물어보시고는 “이름 참 좋네요”라고 매번 말씀하시는 사장님이 계신 세탁소가 있다. 내 이름을 말할 때마다 백이면 백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다정한 말에 나는 매번 처음 들은 것처럼 웃음이 났다. 작은 서점도 생겼다. 니은 서점이라는 인문학 서점은 대학교 은사님이신 노명우 교수님이 만든 곳이다. 지나가다 멈춰 구경하게 되는 이 세련되고 예쁜 서점에서는 매주 흥미로운 강연이나 북클럽, 낭독회가 열린다. 친절한 직원분이 있는 저렴한 과일가게도 있다. 가끔 멜론 한 통을 3, 4천 원에 살 수 있고, 계절마다 맛있는 과일을 추천해준다.


이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보통의 세입자답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이사를 했다. 떠나는 날, 집주인에게 “집이 너무 좋았어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인사를 건넸다. 다음 동네에도 이런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집과 동네에만큼은 쉽게 마음을 주고 싶다. 인생의 힘든 날이 올 때 이 집에서 보냈던 따뜻한 순간들로 일어설 힘이 조금 생길 것 같다. 


조용하고 다정했던 작은 집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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