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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Aug 07. 2021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질 때

집에 있는 엄마는 을이었다

결혼 전까지 일을 하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도맡고 신랑을 챙기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상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게 좋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면 아는 그 갑을관계가 사라지는 것도 좋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스스로 내 직업은 주부다라며 타이틀을 걸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그 역할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느 순간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직장이 아닌 가정에도 갑을 관계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알고 보니 집에 있는 엄마는 늘 을이었다.

끝이 없는 육아전쟁.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집안일.

나는 와이프이자 엄마이며, 학부모이고, 딸이며

며느리에, 이모였고, 고모였고, 동생이었으며

언니 가게에 가끔 일을 도와주는 알바였다.

"너는 집에 있으니까.."라며 이것저것 요구하는 전화들.

그 치다꺼리만 해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심지어 내가 해치운 일들이

그렇게 티가 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슬펐다.

집에 있으니 당연히 해야 되는 분위기 속에서

난 손이 열개라도 모자라다는 말을 실감했다.

여우를 피해서 호랑이 만난 격이었다.


집에서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 일도 신경 쓸게 많은데

내편이 아닌 친청엄마도

신랑 밥 차려줬나/ 정서방 잠도 못 잤는데 잠재워라/ 애는 네가 봐야지/ 엄마가 뭐 그러니/ 엄마라면 이래야지/남자 하는 일 여자 하는 일이 같나/


완전 남의 편인 시어머니도

영양제 보냈다 아들 먹여라:그아들은 손자가 아니라 본인 아들이다../집에서 뭐하니/ 남편 신경 덜 쓰게 애는 네가 봐라/옷 좀 사입혀라/애들이 별나서 아빠 힘들게 한다/신랑 잠 좀재 워라/아들 얼굴이 왜 그러니/

요구는 요구대로 많았고,

집에 있다는 이유로 사건 사고가 생길 때마다

모두 다 내 탓이 되어버렸다.


내가 꼭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나에게 중요한 일인지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인지 경계선이 모호해

구분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단지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은 내가 "논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업무량으로 따진다면 내가 가장 많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당장 만질 수 있는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랑에게 조차 빚을 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 업무를 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대해지는 게 억울했다.

진심으로 '그냥 도망쳐버릴까'라는 생각도 수십 번 했었다.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으며

내 자존감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내 자존감은 남들이 만들어주는 거였다.






나혜석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페미니스트, 소설가 시인,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이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 [생활 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에서 나왔던 글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장영은 엮음/민음사)


"요사이 남녀 문제를 들어 말하는 중에 여자는 남자에게 밥을 얻어먹으니 남자와 평등이 아니요, 해방이 없고, 자유가 없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는 오직 남자가 벌어오는 것만 큰 자랑으로 알 뿐이요, 남자가 벌어지도록 옷을 해 입히고 음식을 해먹이고, 정신상 위로를 주어 그만한 활동을 주는 여자의 힘을 고맙게 여기지 못하는 까닭입니다"라고 주장하며, 가사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전망했다. 오히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여성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여성과 남성 모두 자부심과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생활 개량의 기초가 된다고 나혜석은 주장했다. 그러나 나혜석의 이러한 논거는 자신의 이혼 과정에서 부정된다. 결혼 생활 동안에 한 가사 노동의 가치를 주장하며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재산 분할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저 시절보다 여성의 권위가 향상이 되었다는 바를 부정하는 바는 아니나,

1920년대의 상황이나 실제로 내가 체감하는 현실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맘 졸이며 한 해 두 해 지나가다 보니 연예시절을 빼고도 10년이나 흘렀다.

결혼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로서 내가 약자인 건 확실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신랑 부모님께 잘 보이려 "네네"하며

받아주고 들어주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그래야 하는 사람으로 변질되었고,

시어머니는 입장에서는

나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마음속에서 문득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무얼 해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시댁과의 연락을 오랜 고민 끝에 끊었다.

연락을 끊기까지 했던 자책의 높이를 따진다면

백두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라산은 족히 넘지 않을까?

하지만 그 덕에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심적으로 조금씩 해방되어 나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




강제 모성애와 끝이 없는 책임감의 부여 속에서

며느리로서의 해방을 선언했고,

언니의 아르바이트생으로서의 삶도 그만두었으며

엄마의 부탁은 되도록이면 거절하며 스스로 하게끔 했다.

육아에 있어서는 지나친 집착이나 다른 엄마들과의 비교 속에서 멀어지려 노력했고,

내 마음대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 다짐하며

그 속에 나의 삶도 꼭꼭 채워두었다.

내 마음속에서 작은 기준점을 세워 올곧지만

유연하고 말랑말랑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를 낳은 어머니 나이 때가 60대 이상이니 본인의 삶처럼 딸들에게도 그렇게 강요했고,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나와 같은 과정을 겪는 이가 있다면

기준점을 잘 세워 내가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단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덕을 보겠다는 마음은 깨끗이 비워내는 것이 좋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헛개 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그 누구의 가치관도 믿지 말고 스스로의 생각을 올곧게 세워 실천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도 이 결정을 내릴 때 정말 겁을 많이 먹었었다.

"이러면 어쩌지""저러면 어쩌지"

하지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날씨와 같아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아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다.

대신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낸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 그건 확실하다.


경험상 엄마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내 아이에게는 이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나는 오늘도 여전히 노력 중이다.

걱정의 테트리스 조각은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의 괴물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일을 멈추고

그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온갖 군데서 돈을 최대한 짜내고 분초를 다투면서까지

시간을 빈틈없이 쓰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멈추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으악'하는 소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라고 틈틈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상신호를 감지하고 멈출 줄 아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곧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타이탄의 도구들/팀 페리스/토네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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