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밥 차려줬나/ 정서방 잠도 못 잤는데 잠재워라/ 애는 네가 봐야지/엄마가 뭐 그러니/ 엄마라면 이래야지/남자 하는 일 여자 하는 일이 같나/
완전 남의 편인 시어머니도
영양제 보냈다 아들 먹여라:그아들은 손자가 아니라 본인 아들이다../집에서 뭐하니/ 남편 신경 덜 쓰게 애는 네가 봐라/옷 좀 사입혀라/애들이 별나서 아빠 힘들게 한다/신랑 잠 좀재 워라/아들 얼굴이 왜 그러니/
요구는 요구대로 많았고,
집에 있다는 이유로 사건 사고가 생길 때마다
모두 다 내 탓이 되어버렸다.
내가 꼭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나에게 중요한 일인지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인지 경계선이 모호해
구분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단지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은 내가 "논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업무량으로 따진다면 내가 가장 많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당장 만질 수 있는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랑에게 조차 빚을 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 업무를 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대해지는 게 억울했다.
진심으로 '그냥 도망쳐버릴까'라는 생각도 수십 번 했었다.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으며
내 자존감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내 자존감은 남들이 만들어주는 거였다.
나혜석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페미니스트, 소설가 시인,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이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 [생활 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에서 나왔던 글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장영은 엮음/민음사)
"요사이 남녀 문제를 들어 말하는 중에 여자는 남자에게 밥을 얻어먹으니 남자와 평등이 아니요, 해방이 없고, 자유가 없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는 오직 남자가 벌어오는 것만 큰 자랑으로 알 뿐이요, 남자가 벌어지도록 옷을 해 입히고 음식을 해먹이고, 정신상 위로를 주어 그만한 활동을 주는 여자의 힘을 고맙게 여기지 못하는 까닭입니다"라고 주장하며, 가사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전망했다. 오히려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여성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여성과 남성 모두 자부심과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생활 개량의 기초가 된다고 나혜석은 주장했다. 그러나 나혜석의 이러한 논거는 자신의 이혼 과정에서 부정된다. 결혼 생활 동안에 한 가사 노동의 가치를 주장하며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재산 분할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저 시절보다 여성의 권위가 향상이 되었다는 바를 부정하는 바는 아니나,
1920년대의 상황이나 실제로 내가 체감하는 현실은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맘 졸이며 한 해 두 해 지나가다 보니 연예시절을 빼고도 10년이나 흘렀다.
결혼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로서 내가 약자인 건 확실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신랑 부모님께 잘 보이려 "네네"하며
받아주고 들어주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그래야 하는 사람으로 변질되었고,
시어머니는 입장에서는
나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마음속에서 문득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무얼 해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시댁과의 연락을 오랜 고민 끝에 끊었다.
연락을 끊기까지 했던 자책의 높이를 따진다면
백두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라산은 족히 넘지 않을까?
하지만 그 덕에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심적으로 조금씩 해방되어 나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
강제 모성애와 끝이 없는 책임감의 부여 속에서
며느리로서의 해방을 선언했고,
언니의 아르바이트생으로서의 삶도 그만두었으며
엄마의 부탁은 되도록이면 거절하며 스스로 하게끔 했다.
육아에 있어서는 지나친 집착이나 다른 엄마들과의 비교 속에서 멀어지려 노력했고,
내 마음대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 다짐하며
그 속에 나의 삶도 꼭꼭 채워두었다.
내 마음속에서 작은 기준점을 세워 올곧지만
유연하고 말랑말랑하게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를 낳은 어머니 나이 때가 60대 이상이니 본인의 삶처럼딸들에게도 그렇게 강요했고,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