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를담다 Jun 26. 2022

삶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이가 아이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굴러온 물건을 따라 눈을 돌려보니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넘어져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양파(?) 같은 물건이 아이의 근처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 물건을 주워 소리가 난 곳으로 가 아이를 일으키며 '오구, 괜찮아?'라며 물었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나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무릎이며 팔이며 군데군데 긁힌 상처를 보여주며 '너무 아파서 못 걷겠 떠요. 아.. 이걸 사서 먹으려고 했는데, 이게 여기 있어가지고, 여기에 피나고, 자전거 가지러,...' 라며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다. 마트 옆 한쪽 귀퉁이에 앉으라며 데려다 놓고 양파(?)를 주워 주었더니 양파가 아니라 코코넛이란다.(이 또한 귀엽다) 그렇게 가만히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너무 먹고 싶어서 코코넛을 사러 왔는데 집에 가는 길에 내가 운이 없어 넘어졌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많이 아팠겠다. 조금 쉬었다 가면 괜찮을 거야' 라며 등을 토닥거린 뒤 잠깐 볼일을 보고, 그 자리에 다시 가보았더니 아이는 이내 집으로 돌아간 듯했다.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아픈 환자처럼 울먹거리다 내 모습이 사라진 것을 보곤 금세 툴툴 털고 절뚝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상상 속에 아련히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처음 본 사람에게 속에 담긴 이야기를 구구절절할 수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참 이쁘게 여긴다. 감정을 숨기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위해 빙빙 돌려가며 포장된 말을 내뱉지 않고, 이 얼마나 단순하고 솔직한가. 순수하다는 말을 더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이건 필시 어른들은 따라 할 수 없는 아이들만의 영역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간혹 어른스러운 표현이 자연스러운 아이를 볼 때면 나로선 참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이해와 공감이 아닌 함께 살고 있는 어른들의 암묵적인 강요에 의해서 나온 자기 방어적 표현이라면 기우일까? 이제 태어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된 아이가 '저는 괜찮아요'라며 금방 양보를 하거나, 난감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의젓하게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나도 때 묻은 어른인지라 잠깐 '오~'하며 놀라다가도 이내 마음이 좋지 않다. 잠깐의 그 모습에서 현재와 미래의 아이의 고단함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말은 지금 네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가 먹고 싶고, 하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앞으로 지금보다 더 고단할 일이 많을 텐데 그걸 미리 알아버리면 지금 네 나이에서부터 마음을 많이 쓰느라 앞으로도 내내 분주하고 피곤하게 살아야 할 텐데. 어른 같은 아이가 아이 같은 어른을 달래주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한켠이 아린다.

 

나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생을 돌보는 아이를 기특하다고 칭찬해줄 것이 아니라 동생을 돌보지 않는 아이에게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생을 돌보는 것은 사랑해서 그 동생을 낳은 엄마 아빠의 몫이지 갑작스레 형이나 누나가 되어버린 아이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동생도 잘 돌보네''네가 엄마를 도와줘야지' 등등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많이 자주 내뱉는 것 같다. 어른들이 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아이를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 속엔 억울한 마음, 귀찮은 마음, 속상한 마음들도 있을 수 는데, 사소해 보이는 아이의 여러 감정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우리 일상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 탓에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사소한 것에서도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 어떤 감정도 생각도 부모에게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있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상처받은 마음을 금세 되돌릴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좋은 아이로 성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아이를 떠올리다 보면  마냥 부러운 생각이 든다. (이게 열등감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 9살의 너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12살의 너라면?'

 

내가 겪어나가는 상황을 지금 이자리에서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내면의 아이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지만, 아이를 대할 때면 가끔 일부러 내면의 아이를 데려와 상황을 바라보기도 한다. 아이의 행동과 대화 속에서는 지금의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내면의 아이에게 그때그때 물어보면 아이가 그럴  도 있는 이유가 아주 그럴듯하게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어른들은 알 수 없는, 요목조목 따져가면 100% 이길수 밖에 없는 단단한 논리는 나의 내면의 아이를 통해서만 부서질 수 있었다.




'얘야. 솔직하게 네 마음을 말로 표현해도 돼. 내가 다  들어줄게'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들이든 상관없이 내가 모든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렇지 못할 때도 아주 많지만;) 그 덕분에 우리 아들 딸들은 엄마 아빠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치사하게 저런 것까지 말하냐' 싶은 것 까지도 쫑알쫑알 다 쏟아내야 끝이 난다. 이것을 보기 좋은 쪽으로 돌려 말하자면 아주 민주적인(?)가족이며 신랑과 분통을 터트리며 웃기도 한다.


어린 시절 나도 마트 앞에서 넘어진 아이처럼 창피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놀랐던 경험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괜찮아?'라는 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내 몸과 마음에 난 상처는 한결 나아졌던 것 같다. '괜찮아'라는 말을 통해 나는 공감과 위로를 동시에 담아 낼 수 있었다 ' 아팠겠다. 어른인 나도 그런 적 있어. 큰일 아니야. 누구든 그런 실수를 한단다.'라는. 누구나 듣고 싶은 그런 말 말이다.


아이가 내 뜻대로 된다고 자랑 말고, 아이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걱정 말라. 반대로 아이가 내 뜻대로 된다면 걱정하고, 아이가 내 뜻대로 안 된다면 안심하라. 가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아이에게 뜻이 없다는 거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박혜란/ 나무를 심는 사람들>


요즘 나의 삶은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양심에 걸리는 행동도 참 많이 했었고, 내 작은 이익을 위해 알고도 모른 척 눈을 감았으며, 불의를 보고도 그 피해가 나에게 돌아올까 봐 모른 척 한적도 꽤  많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살고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강심장은 아니었나 보다. 조금만 거스르는 행동을 하거나 상대가 어려워하는 상황을 피해서 돌아갈 때면 비겁한 내 모습에 심장이 뜨거워지며 요동을 쳤던걸 보면 말이다. 내 안에 그 아이가 그때는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고 꼭꼭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아마 예전에도 이같이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을 테지만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을 꼽자면 예전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못 들은 척했던 것이었을 테고, 지금은 그 이야기를 모르는 척 넘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일 테다.


내가 이런 태도로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세상을 대하게 된다면 내 아이 또한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런 배려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맞으면 아프고 빼앗기면 억울하다는 점에서 어른 아이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다고 한다.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사람으로서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소임만은 이 자리에서 묵묵히 해내고 싶을 따름이다. 다른 사람이 하고 안 하고를 따지지 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부터 시작하기. 작은 것에도 빛이 나는 세상은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영표 선수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서 코치가 팔 굽혀 펴기를 열 번 시키면 꼭 열한 번씩 하면서 노력했단다. 그렇게 매 순간 노력해서 결국 그 꿈을 이루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만족감이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허무함의 시간이 길었단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목표를 더 갖는 게 아니라 타인과 삶을 나누는 데 두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받고 사랑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꽤 괜찮은 해피엔딩/ 이지선/ 문학동네>




                    

작가의 이전글 세계는 왜 싸우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