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힘이다
뮤지컬을 좋아한다. 어마어마한 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신작이 나오면 챙겨보고자 하고 나름 좋아하는 배우도 있는 수준이다. 런던 여행 중 라이언킹과 위키드를 봤던 순간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훌륭한 공연에 런던 뽕(?)까지 더해지니 세상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던 것. 그래서 다음에 런던이나 뉴욕을 방문한다면 일주일 내내 매일 밤 뮤지컬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물론 지금보다 돈을 더 벌어야 가능하겠지만..
런던과 뉴욕에서 인상적인 점은 소수의 뮤지컬 극장에서 여러 개의 뮤지컬을 몇 달씩 돌아가면서 공연하는 한국과는 달리 대체로 뮤지컬을 그 뮤지컬 전용관에서 상시 공연한다는 점이다.
뮤지컬 전용관이 대학로의 소극장만큼이나 많고 그곳에서는 한 뮤지컬만 일 년 내내 공연하는 것이다.
자연히 공연장 구조부터 특정 뮤지컬용으로 맞춤 제작할 수 있고 오래오래 공연해 ROI를 뽑기 쉬우니 공연 하나하나 퀄리티도 높다.
뮤지컬이 물가 대비 크게 비싸지도 않다.
물론 한국 가격 대비 싸지도 않지만 원래 런던 물가나 뉴욕 물가가 서울의 가히 1.5배는 된다는 걸 고려해봤을 때 사실상 서울 뮤지컬 물가보다 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런던에는 저렴한 로터리(Lottery) 티켓이 있다.
뽑기를 통해 좋은 좌석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다. 당첨 확률이 높은 건 아니지만-말 그대로 복권 티켓- 한 푼이 아쉬운 학생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재미있는 티켓이다.
그들이 이렇게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뮤지컬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의 뮤지컬 관람객 풀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뮤지컬 팬이 한 공연을 여러 번 보는 성향이 있다고 한들 그 공연을 일 년 내내 할 만큼 수요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무대 시설에 자본을 많이 투입했더라도 티켓 판매를 위해서는 짧게 공연하고 다른 공연으로 변경해야 한다. 그리고 높은 개런티를 주고 유명 배우를 섭외해야 한다. 이렇게 자본 투입이 많이 되었으니 수지 타산을 맞추기 위해서는 티켓 가격을 비싸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공연을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한 공연을 일 년 내내 상영해야 하며 이는 사시사철 새로운 관객이 유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관광객 수요가 필수적인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를 배우고 쓴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패권이다.
외국어를 배우는데 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다른 곳에 쓰게 해줄 뿐만 아니라
유창한 소통 능력으로 인해 자신의 성과를 세계에 보다 쉽게 전달할 수 있고
뮤지컬의 사례처럼 문화 사업 하나를 하더라도 세계에 전달하는 상대적 장벽이 낮은 것이다.
프라하에서 오페라-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를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체코씩이나 왔는데 오페라 한 번 봐줘야겠다고 비싼 돈 내고 오페라를 보러 갔는데, 정말 재미가 없어서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하기 전에 나와버렸다.
오페라가 내 취향이 아닌 이유도 있지만 (발성이나 스토리 등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뮤지컬 취향이다)
가장 크리티컬 한 포인트는 언어였다. 체코어로 진행되다 보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너무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 체코건 프랑스건 공연이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도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대사가 있는 극은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몇 달 전 베를린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을 보았다. 클래식에 관한 한 일자무식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뛰어난 공연이란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청각과 시각, 그 클래식하고 고급진 분위기. 모든 게 좋았다.
이렇게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 같은 뜨내기 관광객에게도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에 영 흥미가 없는 사람만 아니라면 어쨌든 누가 들어도 훌륭한 공연일뿐더러, 오케스트라 연주는 언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베를린 필하모닉은 언어 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것은 아니다. 원래 독일이 가진 훌륭한 문화 자산이 관광객의 니즈에 맞았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처음부터 관광객을 타깃으로 언어장벽 없이 기획된 공연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마카오의 City of dream 호텔에서 진행하는 '하우스 오브 댄싱 워터'라는 극이 그렇다.
물을 주제로 댄서들이 너무나 멋진, 어떻게 보면 서커스 같은 곡예를 선보이는 극으로, 예술작품에 감동을 잘 받는 나는 퍼포먼스가 너무나 멋져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아주 찔끔)
그 극도 대사 없이 몸의 퍼포먼스로만 진행되는데 다분히 관광객 수요를 노리고 기획된 것이다.
대사가 있는 극으로는 관광객에게 어필하기 어려우니 과감히 극에서 대사를 빼고 퍼포먼스를 극대화한 것이다.
서울에도 물론 대사 없이 소리와 퍼포먼스를 극대화한 난타라는 극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쉬운 느낌이다. 우리도 런던이나 뉴욕 관광에서 뮤지컬 관람이 차지하는 비중처럼(거의 MUST VISIT 코스다) 매력적인 문화 자본을 만들 수는 없을까? 새삼 런더너와 뉴요커가 부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