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성에 대하여
지난 미국 여행은 정말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캘리포니아는 아름다웠고 날씨는 황홀했으며 사람들은 친절했다.
내 집처럼 자주 갔던 멕시칸 프랜차이즈 치폴레, 남들은 인생 버거라는데 나는 '버거가 다 버거지'를 되뇌었던 인앤아웃버거, 매끼 물처럼 마셨던 블루문 맥주, 서퍼들로 가득했던 베니스 비치, 어두운 10 p.m. 다운타운 LA의 풍경, 흥미로운 작품으로 가득했던 SFMOMA(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하루하루가 지금도 생생한,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추억할 점이 많은 미국 여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식도, 미술관도, 베니스 비치를 가득 매운 근육질의 남자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길거리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참 많다는 것이다.
나는 왜 지금까지 도시에 휠체어 인구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LA가 서울보다 월등히 휠체어 인구가 많을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추정컨대 서울에도 비슷한 수의 휠체어 인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지난 이십몇 년여간 그 사실을 모르다가 새삼 미국 여행을 와서 느낀 것일까?
영화 보는 것을 참 좋아한다. 특히 영화관에서 완벽히 집중한 상태에서 맥주 한 캔을 하며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거의 모든 영화를 혼자 보는데 영화관 VIP 등급이다. 심심하면 영화관에 가 있다고 보면 된다.
영화관에서 줄 서서 발권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항상 어플을 이용한다. 덕분에 영화관에 어떤 좌석이 있는지, 어디가 남았는지를 훤히 보게 된다. 인상적인 점은, 내가 항상 가는 영화관에는 상영관마다 휠체어 전용석이 최소 2자리가 있으나 그 자리가 차 있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휠체어를 탄다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비장애인보다 적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관의 휠체어 전용석은 언제나 비어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자리가 있으면 뭐하겠는가. 이 도시에서는 그곳까지 가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법적으로는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서울시의 저상버스나 지하철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조 설비를 갖춰야 하고, 장애인 탑승 시에 직원이 도와주어야 한다.
법률로 지정된 장애인 이동 권리 보장. 현실은?
하지만 언제나 법은 법이고 실제 오퍼레이션은 오퍼레이션인 법. 우리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가? 거리에는 그들이 보이는가? 이용이 편하다면 많은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에, 거리에 있을 것이고 나 역시 그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같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데도, 휠체어를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없다. 그렇다. 서울은 장애인이 이동하기에 불편한 도시다.
도착하기도 어렵고, 도착해서도 비장애인들로 만원인 엘리베이터를 뚫고 상영관까지 찾아가기도 어렵지만 대형 멀티플렉스는 그나마 다른 곳보다는 갈만할 곳이다. 법적으로 장애인석이 보장되어 있는 데다 장애인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ㆍ노인ㆍ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대한 법률은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을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물을 설치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형 멀티플렉스가 상영관에는 장애인석을 설치하고 바깥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진입할 수 있는 너비와 안전 시설물을 갖춘 장애인 화장실을 마련한 것이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접근성을 위해 필수적인 조치이다. 당연한 일이자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없다.
다시 말하면, 미국에서는 장애인 화장실을 찾기 어렵다. 모든 화장실이 장애인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만들 때 한국처럼 비장애인용을 기본으로 만들고 휠체어용을 한 개 더 만드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화장실을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타지 않은 비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뜨거웠던 지난여름, 내가 본 캘리포니아의 화장실은 참 컸다. 우리나라라면 세면대를 밖에 꺼내고 화장실 두 칸을 만들었을 너비를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게 과감히 세면대 포함 하나의 큰 화장실로 유지한다. 벽에는 손을 짚을 수 있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고 문턱은 없다.
미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장애인법(ADA : 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 있다. 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한 법률이다. 이 법에 따라 많은 미국 화장실들이 처음부터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화장실은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일뿐일 터, 내가 감히 알아차리지 못한 일상의 작은 요소 하나하나부터 차이가 날 것이다.
미국은 단점이 많은 나라다.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이자 가장 큰 시장이지만 빈부격차가 심각하며 거리에는 홈리스가 가득하고 밤늦게 혼자 다니기도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의 거리에서 만난 상대적으로 많은 장애인과 장애인을 고려하는 것이 기본인-시혜적이지 않은-화장실을 보고 느꼈다. 아, 미국이 선진국이구나..
물론, 대한민국의 상황을 이해한다. 인구 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땅이 넓은 나라다. 그만큼 공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유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Km 당 LA 인구 밀도는 3,198 명(2014), 뉴욕은 1만 831명(2018)인 반면 서울 인구밀도는 1만 6204(2018)에 달한다.
좁은 토지에 사람은 많으니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니즈가 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애초에 모든 화장실을 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는 너비로 만들자는 게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보다 높다는 유럽 선진국들을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 장애인이 많다거나 장애인 화장실이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한국만의 이슈가 아니다.
그렇다면 접근성에 대한 개념을 확장한다면 어떨까? 모두가 스마트폰을 든 시대. 접근성이라는 것이 비단 오프라인만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비장애인이 손쉽게 정보에 접근하듯이, 장애인도 동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느냐가 이슈가 될 수 있다.
웹 접근성(web accessibility)이란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 모두가 웹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부분의 웹사이트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에, 실질적으로 웹 접근성은 장애인도 편리하게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보장하는 것과 관련 있다.
웹 접근성의 중요도는 점차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애플이 단행한 iOS 주요 업데이트는 접근성 확대와 관련 있다. 색약을 위해 텍스트에 더 선명한 컬러를 사용하고 글자 크기는 키웠다. 스마트폰 화면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보이스 오버 기능은 발전시켰다. 덕분에 아이폰 유저라면 간단하게 설정 > 일반 > 손쉬운 사용에서 보이스 오버 기능을 선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웹 접근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는가?
대답은 NO.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웹 접근성 자체가 한국에서는 이슈가 된 지 오래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이트가 충분한 정도로 대응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갓 도입된 것이기에 점차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오전에는 강남에 있고 오후에는 홍대에 있곤 한다. 영화관에 가는 걸 좋아하고 스마트폰으로 SNS를 보고 쇼핑을 한다. 내가 만약 갑자기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될까?
원하는 것에 접근하고 싶은 욕망은 똑같다.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보장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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