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어하우스 문화에 대한 단상
대학생 때는 여행할 때 한 방에 이층 침대 몇 개가 들어 있는 호스텔(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 룸을 즐겨 이용하곤 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은 데다가 무엇보다 호텔에 비해 숙박비가 월등히 저렴했기 때문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프라하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보통은 호스텔에서 여성 전용 룸을 이용한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성수기여서 그랬는지 갈만한 호스텔의 여성 전용 룸이 전부 만실이었다. 남은 것은 남녀공용 믹스룸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각각 침대를 쓰는 거라지만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방을 쓰는 일은 거의 없지 않나. 한 번도 믹스룸에 묵어본 적이 없었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성전용 룸은 만실이었고 그렇다고 호텔에 가자니 돈이 없었다. 그때 나는 인턴 하며 받은 월급을 전부 털어 여행을 계획한 터였다.
고민을 이야기하자 먼저 유럽에서 믹스룸에 묵어보았던 친구들이 용기를 주었다. 유럽에서는 믹스룸이 아무렇지도 않고 사람들 모두 각자 여행만 하지 아무도 남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다.
결국 나는 용기를 내서 믹스룸 예약 버튼을 눌렀다. 사실 막연하게 '4인실 믹스룸인데 여자가 대부분이고 남자가 한 명 정도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돌바닥이 예쁜 프라하에 도착했다. 카운터의 스페니쉬 직원과 몇 마디 농담 따먹기를 하며 체크인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 보니 웬걸, 4명 중 나머지 3명이 건장한 백인 남자애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깜짝 놀랐다. 그래서 짐만 풀어놓고 카운터로 돌아가 여성전용 룸으로 방을 바꿔달라고 했다. 하지만 카운터에서는 난감해하며 지금은 여성전용 룸이 만실이라고 했다. 그 애들 다 착한 애들인데..(왜 그러냐)라고도 했다. 어쨌든 결론은 지금은 여성전용 룸이 만실이어서 바꿔줄 수 없고 내일 바꿔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실망한 채로 돌아섰다. 조용히 있다가 내일 빨리 방을 바꿔버려야지 생각했었다.
난리 친 게 무색하게도 나는 하루 사이에 그 친구들과 친해졌다. 방에 돌아가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나누니 그 애들은 모두 20대 초반으로 한 명은 혼자 여행 온 아일랜드인, 두 명은 덴마크인 일행이었다. 나처럼 대학생 방학을 맞아 여행을 온 것이었고 EDM을 굉장히 좋아했다.
우리는 그새 친해져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며 놀았다. 그 방이 15번 방이었기 때문에 여긴 Room 15 클럽이라고 시답지 않은 소리들을 하면서 잘도 놀았던 것 같다. 그리고 친해져서 프라하 여행 내내 같이 다녔다.
한국에서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는 적응을 꽤나 잘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헤어질 때는 그 친구들이 기념으로 Room 15 문신을 새기자고 제안도 했었는데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페이스북으로 가끔, 아주 가끔 연락하곤 한다.
사실 서로 모르는 남녀가 같은 방을 쓰는 것은 한국인끼리는 정말 어색한 일이다. 내가 외국인 남자애들과 도미토리를 같이 써도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남녀가 쉐어 하우스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친구들도 나를 어색하지 않게 대했고 나는 외국에 나와서 그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니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대도시의 월세는 정말 비싸다. 주거비용이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 같은 경우 젊은 세입자들은 주거비용으로 임금의 거의 절반을 쓴다는 통계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특히 경제적 여유가 적은 학생의 경우 남녀 상관없이 아파트 하나를 여럿이서 공유하는 형태의 Co-living, 또는 쉐어 하우스가 발달했다. 주방과 거실은 공유하고 방만 따로 쓰는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아일랜드인 남자애가 먼저 호스텔을 떠나고 그 자리에 한국인 남자애가 들어왔다. 재밌는 점은 나는 아일랜드인 남자애와는 정말 잘 놀았고 그쯤에는 '믹스룸 별 거 아니네'라는 심리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남자가 들어오니 엄청나게 어색해졌다는 것이다. 외국인들과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한국인끼리는 너무 어색해서 신기했다. 아무래도 연인도 가족도 아닌 남녀가 같은 방을 쓰는 게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 그러겠지.
궁금하다. 서울도 집값이 비싼데 왜 쉐어 하우스 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걸까? 청춘시대 같은 쉐어 하우스 이야기는 왜 그저 드라마 이야기인 뿐인 걸까?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아무래도 주거 비용이 비싸다, 비싸다 하지만 뉴욕이나 런던, 샌프란시스코, 홍콩 같은 정말 너무 비싼 대도시만큼 비싼 것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별 수 없이 타인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너무 비싼 도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서울은 안락함이나 위치를 조금 포기하면 그래도 월세로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는 편이다. 운이 좋으면 전세도 구할 수 있다. 서울은 혼자 사는 것을 포기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같이 살만한 메리트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 도시인 듯하다.
그리고 남녀가 쉐어 하우스 하는 것이 흔치 않은 이유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교문화 때문도 크다고 생각한다. 아직 많은 이들의 마음에는 남녀 칠 세 부동석을 외쳤던 유교의 헤리티지가 남아있으니 말이다. 만약 내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와 거실만 공유하는 쉐어하우스를 한다고 하면? 아마 우리 엄마가 기절하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한국인도 외국에 나가면 남녀 관계없이 쉐어 하우스를 한다
사실 한국인들도 서양권에 유학을 가면 룸메이트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아파트를 나눠 쓰기도 한다. 전에 LA에 있는 친구 집에 갔었다. 그 집도 방 두 개를 한국인 여자 유학생인 내 친구와 역시 한국인 유학생인 남자 한 명이 각각 쓰고 거실과 주방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둘은 친구사이 었고 LA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 친구들 외에도 미국과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간 많은 친구들이 인종과 성별 관계없이 쉐어 하우스를 많이 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와서 서울에서 인종과 성별 관계없이 동일한 형태의 쉐어 하우스를 할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은 것 같다. 경제적 유인도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한국에서 그렇게 하면 아마도 부모님이 난리가 나고 다른 사람들이 룸메이트들과의 관계를 오해할지도 모른다. 한국문화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이런 지점들을 볼 때마다 나라마다 문화가 이렇게 다르구나, 그리고 똑같은 한국인들도 머물고 있는 문화에 따라 행동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실감한다.
거기선 맞고 여기서는 틀리달까. 세상에는 참 절대적인 일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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