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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래 Oct 14. 2018

낭만적 여행과 그 후의 일상

자기 발견과 카드 명세서 사이


여행을 하면 나를 찾게 되나요

'힐링'이 유행했던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여행을 통해 나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유행이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한 후에(꼭 대기업이어야 한다)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 이국적인 배경에서 화보 저리 가라 하는 사진을 찍고 한 두 마디 멋진 문구를 덧붙인 SNS의 여행 피드들,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진짜 나를 찾았다는 여행기들이 유행이었고 세계 일주를 하거나 장기 여행을 다니거나 알만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니는 여행자들이 스타가 되곤 했다.



시대는 변하고 또 변하는 걸까. 힐링 열풍이 식었듯 그런 류의 여행기의 인기가 예전보다는 식은 듯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여행이 예전보다 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가 항공이 발달하고 여행 정보를 얻기가 쉬워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덕분에 출국자수는 날로 최고치를 경신하고, 이제는 흔히 가는 아시아권이나 유럽을 넘어서 남미, 아프리카, 중동 등 과거에는 가기 힘들었던 곳까지 발길이 닿고 있다.


그리고 '진짜 나를 찾았어요'류의 여행기 인기가 식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알고보니 여행을 통해 크게 뭔가를 배우는 것은 아니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서가 아닐까. 사실 아무리 낯선 환경, 새로운 경험이라지만 보통 여행 기간은 길어야 몇 달에서 며칠에 불과하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찾는 게 신기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뭔가를 꼭 배워야 하는지 자체도 의문이다. 한 번은 친구가 유럽 여행을 장기간 다녀온 뒤에 다소 실망한 투로 말했다.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생각만큼 시야가 트이는 건 없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다소 의아했다. 여행이 뭔가 배우려고 등록한 수업도 아니고 즐거웠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뭔가를 꼭 배워야 하나 싶어서였다. 자소서에서 과거 내가 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그런 것일까?



그냥 좋고, 즐겁고, 때로는 팬시 하기까지 하니까

사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즐겁기 때문이다. 좋고, 즐겁고, 때로는 팬시 하기까지 해서 sns나 카톡 프로필 사진에 자랑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올해 내가 휴가 내고 유럽을 열흘 가량 여행하는데 수백만 원을 썼다. 그 돈을 열흘간 한국에서 썼어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실 여행을 하게 되면 다른 모든 걱정은 그야말로 '일시정지' 모드에 들어가고 아무 생각 없이 소비 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평소라면 회사 일에 치이거나 공부에 허덕이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어느 정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이 모든 것들을 강제 정지시키고 당장의 행복에만 집중할 수 있다. 고민거리라고 해봐야 '다음엔 어디서 놀지', '오늘 저녁에 뭐 먹지' 정도?


때로는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굴기도 한다. 매끼 맛집을 찾아다니고 한국에서는 자주 가지도 않는 팬시한 레스토랑들을 저녁마다 가기도 한다. '이때 아니면 사기 힘드니까' 또는 '한국보다 싸니까'라는 미명 하에 지갑 여는 데도 어찌나 관대해지던지. 쇼핑 아이템을 하나 둘 집어 들다 보면 올 때는 넉넉했던 캐리어 공간이 어느덧 부족해지곤 한다.


다이어트를 하다가도 중단하고 먹고 싶은 것을 양껏 먹는다. 하루 3끼보다 더 먹을 때도 있다. 맥주를 좋아해서 매끼 마신다. 한국에서 그러면 알코올 중독인데 여행 중일 때는 그래도 양심에 안 찔린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돈 펑펑 쓰고 하고 싶은 대로 막 사는 게 아닐까

그러니 여행이야 말로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돈 펑펑 쓰고 순간순간 하고 싶은 대로 막 사는 건 아닐까?


그런데 금수저가 아닌 다음에야 평소에 그렇게 살 수가 없으니 여행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지겹고 피곤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상에서 잠시 비켜서서 그런 고민이라고는 가져본 적도 없는 듯 현실 도피하기 위해서.



몇 년 전 다녀온 방콕의 길거리 과일 가게. 항상 더운 나라 특유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낭만적 여행 뒤, 남은 것은 '카드 명세서'

그래서 말인데, 낭만적 여행 뒤 가장 눈에 띄게 남는 것은 사실 '자기 발견'이나 '넓은 시야'보다는 카드 명세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카드 명세서가 추상적인 '나를 찾았다'는 말보다 더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현실 도피든 낯선 나라에 대한 동경이든 평소에는 누릴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든 뭐든 간에 어쨌거나 여행이 너무 즐겁고 좋다. 그리고 좋아하는 걸 계속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금수저가 아니니까 계속 일을 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내 통장에 월급을 꽂아주는 회사를 위해 밥값을 한다는 걸 증명해야 하며, 앞으로도 계속 만족할만큼 돈을 잘 벌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동기부여가 아닌가.


아무래도 나는, 그리고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무작정 세계일주를 떠날 만큼 과감한 사람은 못된다. 낭만은 여행으로 한정하고 평소에는 지난하지만 치열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다음 달에는 방콕에 가고 싶다. 입맛에 딱 맞는 팟타이, 얼음을 넣어 차가운 싱하 맥주를 먹고 낭만적인 방콕 야경을 보고 싶다. 무엇보다 벌써 겨울인 것처럼 추운 한국을 떠나 더위를 느끼고 싶다. 그 생각을 하면 힘이 나니까, 그리고 여행 비용 생각을 하면 더 '현실적인' 힘이 나니까. 그 힘으로 내일 아침 지옥철과 쌓인 테스크들과 예정된 미팅들을 버티고 해낼 계획이다.



▼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

https://www.instagram.com/hey.kw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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