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비로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루 Jun 10. 2018

마음을 아껴두는 것

그리고 온전히 마음을 드러내는 것



온 마음으로ㅡ 사랑한다. 반짝이는 눈으로 말하며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

온 마음으로ㅡ 사랑하지만 사랑하니까 마음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


연애든 인생이든 관계는 밀당이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죄인이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관계는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겉뿐인 그 관계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말은 좋지, 적당히. 하지만 적당히 라는 말처럼 잔인한 말은 없다. 적당히가 가진 수없이 많은 얼굴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상처받아 왔다. 비극은 나의 '적당히'와 너의 '적당히' 가 결코 같을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온전히 다 드러내는 관계는 어떨까? 글쎄, 난 그걸 '능력'이라 부르고 싶다.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생각은 더 견고해진다. 관계에 치이고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좋은 걸 좋다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간다.









얼마전에 귀리를 심었다.

우리집 고양이- 헤어볼 제거용 간식이라 해야하나,

기본이 육식 동물이긴 하지만 이렇게 캣그래스를 먹어주면 장기에 자극이 되어 헤어볼을 토해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 웬만큼 규모가 있는 펫샵에선 캣그래스를 종류별로 구매할 수 있다. 이전에도 심어 본 적이 있어 잘 자란다는 걸 알았기에 설명서에 나와 있는대로 응달에 며칠 두지 않고 바로 양달이 있는 베란다 앞 테이블에 두었다.


볕 아래에서 자란 이 아이.




귀리의 싹이 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올라왔다. 이제 막 싹이 나기 시작한 귀리가 대가 굵거나 길거나, 제 몸이 무거워서 내려앉은 건 아니였다. 한 둘도 아니고 어쩜 저렇게 다들 한 방향으로 기울었을까를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했다. 햇빛. 베란다 바로 앞에 위치한 내 책상엔 낮시간 내내 볕이 들었고 새싹은 곧장 볕을 향해 제 몸을 뉘이고 있었다.


저녁 무렵 나는 귀리가 눕지 않게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그러면 내일 볕을 반대방향으로 쬐고 싹이 곧게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싹은 다시 제 자리를 찾았고 태양을 향해 잔뜩 누워서 움을 틔우던 아이는 삼일만에 무럭무럭 곧게 자라 화분의 키를 훌쩍 넘어섰다. 키가 제법 자라난 귀리는 더 이상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자라지 않는다.






태양을 향해 온 몸을 기울인 귀리.

그 마음이 꼭 제 마음을 다 전하려 안달복달하는 이의 순수함 같아서. 왠지 모를 부러움이 생겨났다. 나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내 마음을 저렇게 드러낸 적이 있던가, 사랑을 갈구하는 순수한 애정으로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마음을 갈무리해야 한다는 말은 다짐이 되고 버릇이 되어 어느새 나라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나도 언젠가, 한번은, 어쩌면 내 온 마음을 온 몸을 기울여 맹목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며칠이 지난 귀리는 더 이상 예전의 어리고 태양을 향해 곧던 귀리가 아닌데

나는 괜시리 온 몸으로 태양을 쫓던 그 어린 싹이, 온전히 마음을 전하던 그 몸짓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난떤다고 말하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