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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 Jun 15. 2018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해야 하나요


 우리나라엔 아니 이 도시엔 아니 내 주변엔 유난히 '싫다'에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좋다'라고 하면 무던하고 성격좋은 사람으로 포장되고 '싫다'라고 하면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 내지는 모난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종종 싫은일에도 좋은 거라 포장해야 하나? 라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의 힘을 믿지만 때론 그런 '옳은 말'들이 되려 상처가 될 때도 있다.


'좋아요' 로봇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라도 있나 싶게 '좋다'만 남발하는. 처음엔 그걸 다정함내지는 친절함이라고도 봤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다 괜찮다는 건 아무것도 괜찮지 않다는 말과 같았다. 비약처럼 들린다고? 


그저 선택을 잘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너무한 말 아니냐고? 글쎄다. 선택에 힘든 사람에게도 엔트리는 있다. 가령 점심 뭐 먹을까 라는 질문에 한식? 응 괜찮아 일식? 응 괜찮아 중식? 응 괜찮아 라고 답하는 것과 한식? 응 괜찮아 일식? 응 괜찮아 중식? 흠, 그건 좀 느끼한데 일식과 한식 둘 다 너무 좋은데 못 고르겠어. 라고 답하는 건 천지차이라는 거다. 


종종 아무렇지 않게 싫은 걸 잘도 이야기 하는구나, 와 같은 말을 듣는다. 그게 왜, 어때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할까. 좋은 게 확실한 만큼 싫은 것도 확실할 뿐이다. 사람에 대해선 그나마 무던한 편인데 디자인, 컬러, 가고싶은 곳, 먹고 싶은 것, 신념, 이념과 같은 것엔 주장이 확실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뭔갈 제안하는 입장인데 종종 '좋아요' 봇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퍽이나 난감해진다. 상대의 의도는 대충 짐작이 되는데 그걸 지켜보는 나는 또 결정권자가 되는 부담감을 안아야 하는 것이다.  내 고집만 세우는 사람이 되는 건 나도 싫다, 게다가 결정된 내용에 대해 평가까지 고스란히 내 몫이 되는 일이 연거푸 일어나면 사람 만나는 게 퍽 부담스러워 지는 것도 사실이고. 


몇 번 이런 내용으로 고민을 해봤는데 그렇다고 뭐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다. 좋아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그저 그런 척을 해가며 나를 포장해 내가 아닌 나로 살길 원하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내겐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게 크기도 하고. 다만 내게도 한 번씩 내 기질과 상관없이 그러한 선택들이 버거워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런 순간에도 여전히 '싫은 소리를 잘도 하는 사람'이란 낙인이 남아 있다는 게, 왜 아무도 그런 순간의 나를 위해 대신 '싫은 소리'를 해주지 않는 건지. 그게 무슨 그리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다들 그리도 몸을 사리는지. 


주사를 맞는 게 무섭지 않다고 해서 매일매일 주사를 맞을 순 없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게 꺼려지지 않는다해서 24시간 빙글빙글 돌고 있을 순 없다.


그러니 당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나를 위해 한 번쯤은, 가끔은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한다고.


꺼리진 않지만 반기지도 않는 

가볍지 않은 그 짐을, 반기지 않는 그 짐을 덜어주었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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