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이 많아 그녀를 만났지만 사실 그보단 하고 싶지 않은 말이 더 많았다.
왜 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하고픈 이야기들을 거의 다 끝내고 이제 곧 이야기 거리가 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자 문득 불안해졌다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해야 할 차례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이란 게 대체 뭐길래 그렇게 안절부절 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 말들을 대신할 위장된 이야기를 해야 할 특정 상황에 대한 조금의 귀찮음과 불편함, 그리고 부담감 때문이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내가 원해서 만난 그 사람이 내가 이야기 하는 말들에 맞장구를 쳐주고 내가 하고픈 말들만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구절절 말하고 어설픈 위로를 받는다고 해결될 일들도 아니고 만약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어설픈 자기고백이라도 한답시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고 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매번 후회하는 걸. 나의 불안한 예감이 적중이라도 한 걸까 어김없이 원치 않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녀의 질문을 가만히 들으며 생각해본다. 과연 내 맞은편에 앉은 이 여자는 나의 친구인가. 나의 적인가. 하고.
잘 지내지 못해도 잘 지낸다. 괜찮다. 사는 게 그런거지. 별 거 없다. 라고 말을 해야 하고 매일 먹는 김밥이 지겨워도 그래도 밥이라도 먹고 산다. 요샌 세상이 좋아 김밥도 여러종류더라. 라는 류의 말들을 하며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그런 이야기를 풀어낸다.
잘 지내지 못해도 잘 지낸다 말하면 이제부터라도 정말 잘 지내게 될 것만 같고, 지겨운 김밥도 맛있다 하면 정말 세상 둘도 없는 별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조금 섞어서 말이다.
그럼 친구는 이내 이렇게 대답한다.
"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도대체 뭐가 다행이지?
아직까지는 견딜만 한지 걱정많은 친구를 안심시켜줄 수 있는 여력은 있는 나의 처지가 다행인걸까?
맛없는 김밥도 맛있다하고 사는 게 그럭저럭 괜찮다고 말하며 어떻게든 괜찮아지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긍정적인 생각이 다행인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친구의 못살겠다라는 멘트와 함께 몇시간이라도 계속될 눈물의 신세한탄을 안 들어도 되는 너의 지금 처지가 다행인걸까?
그랬다. 늘 위로가 필요한 처지인냥 위로없인 견뎌낼 수 없을 것 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그 위로가 내 눈안에 발 앞에 손바닥위에 떨어지면 그제서야 알게 된다.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었음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함을. 위로라도 있어 고맙다. 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팍팍하다는 걸. 아니, 그 정도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위로는 아마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았을 거란 걸.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