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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Oct 11. 2024

축! 한강 노벨 문학상! 13화. 미인이 왔다

오전에 합계 1 톤쯤 되는 물건들을 집품한 후 점심을 먹고 6층에 있는 넓은 계약직 휴게실에서 쉬는 시간은 천국 같았다. 동바이, 마랑과 함께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들어 오는 게 눈에 보였다. 너무 시원해 보여 우리는 절로 눈이 갔다.     


그때 동바이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점심 식사 후 쉬는 시간에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다. 동바이가 화면을 보더니 얼굴이 흐려지며 전화를 받았다.     


“ทำไมอ่ะ? พี่คะ! (왜? 언니!)”     


전화기에서는 태국어가 들려왔다. 뭐라고 한참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듣는 동바이의 얼굴이 점점 더 흐려지더니 급기야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ทำไมฉันต้องจ่ายด้วย... พี่ๆเขาทำอะไรกันหรอ? ฉันส่งเงินค่าครองชีพไปให้จนถึงตอนนี้แล้วไง (왜 내가 내야 하는데... 언니 오빠들은 뭐 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생활비 보냈잖아.)”     


그리곤 전화를 확 끊어 버렸다.      


“เกิดอะไรขึ้น?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동바이가 고백했다. 동바이의 부모는 왕족의 먼 친척으로 한동안 방콕에서 부자로 살았다. 하지만 한순간 실수를 해 왕족 연금이 끊어지고 살고 있던 왕궁 같은 집에서도 쫓겨났다. 방콕 주변의 거지 같은 집에 사는데 부모는 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왕족으로 태어나 하인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생활한 부모는 몰락해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줄 모르고 일하지 않았다. 지붕에서 비가 새도 하인이 세숫물을 떠다 바쳐야 세수를 하는 사람들이다. 자녀가 다섯이나 되었지만 일하는 사람은 동바이 하나였다. 동바이는 한국까지 와서 일을 해 생활비를 집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파 병원비를 내라는 언니의 전화였다. 동바이는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때야 나는 동바이의 빨간 머리가 튀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살며시 말해 주었다.     


“แต่พ่อต้องไปโรงพยาบาลไม่ใช่หรอ? (그래도 아버지 병원은 가야 하지 않겠어?)”     


동바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ฉันมีเงินที่ไหน? (내가 돈이 어딨 어?)”     


“ต้องไปคอนเสิร์ตไอดอลด้วยหรอ? (아이돌 콘서트 꼭 가야 해?)”     


동바이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더 말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었다.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 표를 취소하고는 어깨가 푹 처지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힘을 주고 싶어 내가 소리쳤다.    

  

“เด็กๆ! พวกเรากินไอซ์อเมริกาโน่กันมั้ย? (얘들아! 우리 아아 먹을까?)”     


동바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นายรู้จัก อาอา มั้ย? (네가 아아를 알아?)”     


마랑이 물었다.      


“ิไอซ์อเมริกาโน่. หลังจากกินข้าวกลางวันเสร็จก็ต้องกินไอซ์อเมริกาโน่สิ. อันนั้นเป็นสไตล์เกาหลี (아이스 아메리카노. 점심 먹고 난 후에는 아아를 먹어야지. 그게 한국 스타일이야.)”


“ใช่แล้ว ใช่แล้ว. 아아 ถ้ากินไอซ์อเมริกาโน่ก็เป็นคนเกาหลีนะ. (맞아 맞아. 아아 먹으면 한국 사람이야.)”  

  

마랑이 맞장구를 쳐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보여줬다.     

 

“ฉันจ่ายเอง. นี่คือความเมตตาของเจ้าหญิง! (내가 쏜다. 이런 게 신입의 자비지!)”   

  

“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동바이가 살짝 웃으며 한국어로 말했다. 


“ให้ฉันไปด้วยกันมั้ย? (내가 같이 갈까?)”     


마랑이 일어서는 걸 내가 도로 앉혔다.     


“ไม่! ฉันขายของแถวบ้านอ่ะ อ่า อ่า 3อันไม่เบาหรอก! (아냐! 내가 힘이 동네 장사라 아아 세 개쯤은 가볍지!)”     

나는 둘에게서 텀블러를 받아 들고 출발했다.      


여기 물류 센터는 참 대단하다. 크기도 엄청 크지만 바벨탑 같은 거대한 건물 안에 별 게 다 있다. 1 층에는 작은 카페도 있다. 카페 공간이 작아서 앉을 수는 없지만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식으로 테이크 아웃 커피를 판다.  

    

판매대 앞으로 다가 가자 한쪽에 석진과 지혜 이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작업하기 편하게 다 바지를 입는데 지혜는 늘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항상 눈에 띈다. 석훈이 옆에 있어서 잠시 머뭇했지만 뭐 커피 사는데 관리자 노동자 구분이 있나? 당당하게 주문대 앞에 서서 ‘아아 3개’를 주문하고 돈을 낸 후 가져온 텀블러를 내밀었다. 그걸 보더니 석훈이 말을 걸었다.  

    

“람야이님! 점심 끝나는 시간 맞춰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꼭 이런 말을 해야 하는가? 잠깐 째려봐 주었다. 그러나 대답은 유순하게 했다.      


“예!”     


기다리는데 석훈의 귀에 대고 빠른 한국말로 작게 말하는 지혜의 말이 들렸다.     


“여기 커피 비싸서 외국인 사원들은 잘 안 오는데...”     


하지만 나는 다 들었다. 굴욕스러웠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 지혜 쪽을 보는 석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그때 카페직원이 ‘지혜 이사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일회용 컵 4개들이 트레이 4개가 지혜 쪽으로 나왔다.      


“석훈님! 도와주세요! 인사부까지 들고 가야 하는데...”     


“혼자 가요!”     


석훈은 평소처럼 무뚝뚝했다.     


“트레이 4개를 어떻게 혼자 들어요? 직원들 나눠 주려고 하거든요.”     


지혜가 웃으면서 애교를 부리자 석진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트레이 2개를 얼른 집더니 앞서 나갔다.      


“이사님! 빨리 갑시다!”      


지혜가 미소 지으며 나머지 트레이 2개를 들고 석진을 따라 가 옆에 붙었다. 다 들리진 않았지만 지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상무님! 회사 앞에 새로 식당이 생겼더라고요. 맛집이래요. 제가 한번 살게요. 지난번에 초콜릿도 주셨는데.”     

점점 멀어져서 석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옆에서 붙어가는 지혜의 스커트가 하늘거렸다. 반짝거리는 하이힐, 세련된 실크 블라우스, 나긋나긋한 말,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이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태국에서 입고 온 목이 늘어진 티셔츠, 아무렇게나 입기 좋고 무릎이 나온 작업복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닷새 일하고 드디어 기다리던 휴일이 되었다. 오늘은 동바이가 내 환영 파티를 열겠다고 며칠 전부터 큰소리쳤다. 여기서 일하는 태국 출신 동료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고. 한국식으로 치킨에 맥주를 하자고 했지만 나는 너무 고향 음식이 먹고 싶어서 요리 솜씨를 뽐내겠다고 했다.    

  

기숙사 공유 식당 안에 조리 시설이 있어서 팟타야와 똠양꿍을 만들 수 있었다. 인덕션 위에 커다란 프라이팬을 얹어 놓고 미리 준비한 국수에 태국 마트에서 주문한 태국 향신료를 넣고 볶는데 너무 행복했다. 십만 년 만에 맡아보는 듯한 태국의 냄새.      


마랑이 테이블에 접시와 젓가락 숟가락을 놓는데 아농낫은 공주답게 뒤에서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นายเบื่ออาหารแล้วใช่มั้ย? (너 식당 한 거 맞지?)”     


“ค่ะ เจ้าหญิง! (네. 공주님!)”   

  

행복한 마음에 절로 공손한 대답이 나왔다.     


“คนที่สั่งวัตถุดิบอาหารคือฉันเอง (식재료 주문한 사람은 나야.)”      


“ขอบใจนะ มารัง! (고마워. 마랑!)”     


그때 5명의 태국 남자들이 시끄럽게 나타났다. ‘냄새 좋다!’ ‘이거 똠양꿍 아냐!’ ‘살 것 같다!’ 등등의 소리들. 서로 인사를 하며 들어와 요리하는 내 곁으로 오더니 음식 냄새도 맡고 난리가 났다. 그때 세련된 방콕 말투가 옆에서 들렸다.      


“ไหนบอกว่าคนสวยมาแล้วไง. (미인이 왔다고 하더니.)”     


돌아보자 웃는 남자가 서 있었다. 반짝거리는 구릿빛 피부, 균형감 있는 얼굴, 좋은 체격, 세련된 방콕 말투의 주인공 20대 남자였다. 우리는 ‘안녕하세요!’하고 서로 인사했다. 그때 동바이가 다가와 옆에 선 태국 남자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นี่คือ อุไร พานิชาน วีระเทพ สุชาติดี และ อา, (여기는 우라이, 파니탄, 위라옷, 수차와디 그리고 아,)”     


하는데 방콕 말투 남자가 얼른 나서며 스스로 소개했다.      


“อานงนัตค่ะ ยินดี. (아농낫이에요. 반가워요.)”     


남자가 손을 내밀어서 엉겁결에 악수를 했다. 동바이가 공주답게 모두에게 명령했다.      


“ทุกคนนั่งลง. ขอโทษที่ฉันเรียกมาช้านะ. เวลาทำงานของทุกคนไม่ตรงกัน. (다들 자리에 앉아. 내가 너무 늦게 불러서 미안하다. 다들 근무 시간이 안 맞아서.)”     


동바이가 모두를 돌아보며 테이블을 가리키자 태국 친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ขอบคุณ! 똥공주님! เป็นเกียรติมากที่คุณเชิญผมมา (감사합니다! 똥공주님!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들은 동바이를 똥공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동바이는 들은 척 만 척 자리에 우아하게 앉았다. 마랑이 차려 놓은 식탁에 둘러앉아 내가 요리한 팟타야와 똠양꿍을 올려놓았다.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가 퍼지자 다들 바쁘게 음식을 자기 접시에 퍼 갔다. 한 입씩 입 안에 넣고 행복한 얼굴들. 아농낫이 제일 먼저 탄성을 질렀다.      


“อืม! นี่คือรสชาติของประเทศไทยสินะ (음! 이것이 태국의 맛이지.)”


“รสชาติที่อบอุ่นของชนบท! (이 훈훈한 시골의 맛!)”     


입 안 가득 들어간 음식을 우물거리며 마랑이 탄복했다. 내가 만든 요리지만 백만 년 만에 맛보는 태국 요리에 나도 감탄했다.    

  

“มีความสุขมากเลย... เหมือนมาประเทศไทยเลยครับ. (너무 행복하다... 태국에 온 것 같아요.)”     


“ทำอะไรแบบบ้านนอกเนี่ย? มาโซลแล้วถามหาประเทศไทยทำไม? อาหารเกาหลีนี่ช่างมีระดับเหลือเกิน... (후지게 뭐니? 서울에 와서 왜 태국을 찾아. 한국 음식이 얼마나 세련됐는데...)”     


역시 동바이다. 또 촌스럽다고 야단을 치자 아농낫이 바른말을 했다.     

 

“คนเกาหลีที่กำลังมองหาอาหารไทยในกรุงโซลก็เยอะค่ะ (서울에서 태국 음식 찾는 한국 사람도 많아요.)”  

    

너그럽게 웃어넘기자 다들 ‘맞아! 맞아!’ 하며 시끌벅적해졌다. 동바이는 놓치지 않고 공주님 어록을 풀었다.     

“ทุกคนกินให้อร่อยนะ! ตั้งแต่พรุ่งนี้เป็นต้นไปคือทำงานกลางคืน (다들 잘 먹어둬! 내일부터는 야간 근무니까.)”          

*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같은 한국에서 글쓰는 작가로서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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