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운 Oct 13. 2024

14화. 야간 일 많이 주세요!

낮에 하는 일도 많이 힘들지만 밤에 하는 일은 더 힘이 든다. 3리터 네 개짜리 세재 박스를 들어 대용량 카트에 20 개쯤 올리니 낮에 하던 일보다 2배는 힘들었다. 땀이 흥건하게 나며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찼다. ‘이것만 끝내야지!’ 다짐을 하며 기계적으로 손발을 놀렸다.      


세재 박스를 끝내면 좀 가벼운 게 올 줄 알았다. PDA는 결코 그런 걸 시키지 않는다. 이번엔 24개 들이 음료수 박스이다. 이미 대용량 카트에는 세제 박스 20개와 10킬로 쌀 10 포대가 쌓여 있는데 그 위로 또 쌓으니 죽을 것 같이 힘이 든다. 정신이 나가는 것 같고 눈앞이 흐려졌다.      


산처럼 물건들이 쌓인 대용량 카트를 밀어 하적 하는 관리자 석 앞까지 갔다. 석훈이 컴퓨터 앞에 서서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헉헉거리며 지나가자 흘낏 쳐다본 것 같다. PDA가 새벽 3시를 가리켰다.    

  

다시 PDA가 대용량 카트 싣기를 지시해 또 8개 들이 분유통 박스 20개, 3리터 간장통 4개들이 박스 10개를 싣고 다른 물건을 집으려 콜라팩 섹션 앞을 지나갈 때였다. 동바이가 팔렛 (물건을 쌓아 두는 지지대)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람야이!”     


동바이가 불렀다. 창백한 얼굴, 흐린 눈빛, 힘없는 목소리였다.      


“ช่วยฉันหน่อย! (나 좀 도와줘!)”     


도저히 도와줄 수 없었다. 나도 죽을 것 같았다.  

    

“ฉันก็เหนื่อยเหมือนกัน. และเมื่อมันจบลง... (나도 힘들어. 이거 끝나면...)”     


맞은편 섹션에 도착해 4킬로 강아지용 사료 포대를 싣고 있는데 옆에서 ‘털썩’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돌아볼 힘이 없었다. 빨리 이 포대를 다 실어야 했다. 통로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겨우 다 싣고 몽롱한 정신으로 카트를 밀어 관리자 석으로 겨우 가자 석훈이 급히 불렀다. 다급한 얼굴이었다.     

“빨리 기숙사 가봐요. 동바이님이 쓰러졌어요.”     


동바이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히 창고를 나와 기숙사로 뛰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동바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아픈 신음 소리가 났다. 이마에 손을 짚자 뜨거웠다. 온몸이 뜨거웠다. 얼른 욕실로 달려가 수건에 찬물을 적시고 나와 이마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러자 동바이가 약간 정신을 차렸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부채를 찾아 부쳐 주다 공유 식당 한쪽에 의약품 상자가 있던 게 생각났다. 얼른 달려가 해열제를 찾아왔다. 물과 함께 해열제를 먹이자 동바이의 몸이 조금 식어가며 얼굴이 편안해졌다.     


다행이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동바이를 도와줬어야 하는 건데. 조금 늦으면 어때! 태국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짓이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항상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었다. 한국에 와서 ‘빨리! 빨리!’ 문화에 너무 길들여졌다.      


“ขอโทษ! (미안해!)”     


내가 말하자 동바이가 눈을 떴다.      


“โอเคไหม? (괜찮아?)”     


반가워 묻자 동바이가 힘없이 말했다.      


“เขาบอกว่าตอนนี้ไม่ต้องทำงานกลางคืนแล้ว. (매니저가 이제 야간 일하지 말래.)”    

 

“ใช่แล้ว? งานกลางคืนให้เงินเยอะกว่านะ? (그래? 야간일 돈 더 많잖아?)”     


내가 물었지만 동바이는 기운이 없는지 대꾸도 없이 돌아 누웠다. 부채를 부쳐주는데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다음날 근무 시작 브리핑이 끝난 후 석훈을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저 야간 일 많이 주세요.”

    

석훈의 눈이 커졌다.      


“동바이님 야간일 하다 쓰러진 거 몰라요?”    

 

“저 돈 많이 필요해요. 태국에 가족이 많아요.”      


석훈이 눈이 흐려졌다. 왜 내가 불쌍한가?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나는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다. 돈을 많이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싶다.      


야간 근무 주간 끝나고 주간 근무로 넘어가기 전 하루 쉬는 날이었다. 너무 피곤해 오늘은 침대에서 최대한 빈둥거리기로 했는데 동바이는 화장대 앞에서 열심히 화장을 한다. 얼굴은 하얘지고 눈가는 반짝거리고 볼은 발그레해지고 입술은 촉촉한 분홍색이 된다. 한국 아이돌식으로 너무 세련되었다.  

   

맞은편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마랑이 물었다.      


“ใส่ใจมากเลยนะเนี่ย? จะไปเจอจีซอกหรอ? (신경 많이 쓰네? 지석이 만나러 가?)”     


“ค่ะ. (응.)”     


“จีซอกคือใครอ่ะ? (지석이 누구야?)”     


내가 물었다.      


“เธอยังไม่รู้หรอ? เสื้อกั๊กสีเขียวที่อยู่กับผู้ดูแลของพวกเรา ผู้ชายเกาหลี (너 아직 몰랐어? 우리 매니저랑 같이 있던 녹색 조끼 한국 남자.)”     


“จริงหรือ? (정말?)”     


나는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เคอะเขิน. วันนี้ฉันจะไปดูหนังกับคุณจีซอก (촌스럽게. 나 오늘 지석 씨랑 영화 보러 간다.)”     


“หนังเกาหลี? เข้าใจหมดใช่มั้ย? (한국 영화? 다 이해하겠어?)”     


“ถ้าไม่เข้าใจจะเป็นยังไง? การไปดูหนังเกาหลีเป็นเรื่องสำคัญนะ. เป็นคอร์สมาตรฐานที่คู่รักเกาหลีไปเดทกัน. คำพูดนี้คือจีซอกคิดว่าฉันเหมือนแฟนเกาหลีไง (이해 못 하면 어때? 한국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게 한국 커플이 데이트하는 표준 코스야. 이 말을 지석이 나를 한국 여자 친구처럼 생각한다는 거지.)”     


정말 동바이는 대단하다. 벌써 한국 남자랑 사귀고 말이다. 하긴 우리랑 달리 한국에도 몇 차례 왔고 자연스럽게 한국어도 하고 왕족 출신이니 우리랑 다르다.      


“เป็นอย่างนั้น! (그렇구나!)”     


동바이     

한국 영화관은 진짜 깨끗하고 쾌적하다. 방콕에서도 최고급 극장은 이렇지만 여긴 더 세련된 것 같다. 한국 커플처럼 지석과 나란히 자리에 앉을 때는 세상 부러운 것 없이 뿌듯했다. 앞에서 나오는 한국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옆에 둔 커다란 팝콘을 집을 때마다 지석과 손이 마주치는 찌릿찌릿한 느낌만이 머리에 가득 찬다. 그도 그걸 느끼는 걸까?      


정말 서울의 카페는 어디나 다 멋지고 세련되었다. 힙한 그래픽이 그려진 한쪽 구석 테이블에 지석과 마주 보고 앉으니 나도 서울 여자가 된 것 같다.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파르페 주스를 한 모금 빨아 마시자 지석이 웃으며 말했다.      


“영화 재밌었어?”     


최신 유행어를 최대한 외워 두었다.    

  

“개재밌어.”     


지석이 피식하더니 다시 물었다.      


“다 이해는 했니?”     


“당연하지. 취향 저격이야.”      

지석이 또 웃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동바이! 확실히 공주 맞지?”     


“맞아. 날 못 믿어?”     


“그게 아니라 공주라는 게 한국에는 없는 거라.”   

  

나는 핸드폰을 들어 10살 때 국왕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봐! 나 어렸을 때 국왕님이랑 찍은 사진.”     


지석이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해.”      


나는 의기양양하게 주스 잔 위에 놓인 파르페 크림을 찻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음! 달콤한 맛! 그때 맞은편에 앉은 지석이 얼굴을 좀 찡그리는 게 보였다.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 남자가 동남아 여자랑 사귀나 봐!’      


내가 휙 돌아보자 뒤에 앉은 여자들이 신기한 동물 보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여자들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주며 입으로 욕을 해 주었다. 그때 지석이 벌떡 일어났다. 눈이 커져서 쳐다보자 지석이 뒷 테이블로 가서 소리쳤다.     

 

“왜 자꾸 쳐다봐요? 우리 신기해요? 동물 같아요?”     


아니! 지석이 저러다니. 멋져! 뒷자리 여자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한국 남자가 동남아 여자랑 사겨서 신기하냐고요? 신기하겠지. 당신들 태국 공주 본 적 있어요?”     


여자들이 나를 돌아봐서 내가 우아하게 웃어 주었다.      


“없겠지. 내가 태국 공주를 사귄다고요. 알겠어요?”   

  

그렇게 지르고는 지석이 돌아왔다. 잘 생겼는데 저런 개념까지 장착한 멋진 한국 남자! 나는 정말 지석이 너무 믿음직스러워졌다.   

  

람야이


동바이가 데이트를 나간 후 나와 마랑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 두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보이는 말끔하고 깨끗한 남자. 아농낫이 서 있었다.      


“พวกเราไปนัมซานกันเถอะค่ะ! ถ้ามาเกาหลีก็จะไปนัมซานสักครั้ง (우리 남산 놀러 가요! 한국에 왔으면 남산엔 한번 가 줘야죠.)”     


뒤에서 마랑이 환호성을 질렀다.      


“นั่งรถอานงนัทหรอครับ? (아농낫 차 타는 거예요?)”

    

“ใช่! (옙!)”     


“ลำไย! รีบไปเปลี่ยนชุดเร็ว! (람야이! 빨리 옷 갈아 입어!)”     


기숙사 앞으로 나가니 멋진 SUV가 서 있었다. 태국에서는 보지 못한 날렵한 한국차 옆에 서 있는 아농낫.    

 

“งดงาม! (멋지다!)”     


탄성을 지르자 그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เชิญขึ้นเร็วๆค่ะ. (어서 타십시오.)”     


차를 타고 가며 경복궁, 광화문 광장, 남대문 등 시내 구경을 했다. 서울은 화려하고 멋진 도시다. 남산 타워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때 아농낫이 옆에 와 섰다.      


“อันนี้ไม่ใช่รถที่แพงมากหรอคะ? (이거 엄청 비싼 차 아니에요?)”     


“ไม่ค่อย. (별로.)”     


아농낫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คุณพ่อเป็นประธานบริษัทไกวัลมาร์ทครับ. (아버지가 꽈이룽 마트 그룹 회장이에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