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거 때문에 욕먹었잖아.”
말을 못 알아들을까 봐 손가락 엄지를 세워 다운 표지까지 했다. 그녀의 얼굴이 대번 굳어졌다.
“아니에요. 맞게 넣었어요.”
노동자들은 다 그렇게 말하지. 자기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알 게 뭐야!”
“두 번 셌어요.”
“그럼 샴푸 한 개가 어디 갔어요? 역시 외국인은 안 돼!”
순간 람야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혼자 말하듯 했지만 그녀가 알아들었다. 내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외면하자 람야이가 화난 얼굴로 돌아서 갔다. 퇴근 시간, 모여든 40여 명의 노동자들 앞에서 다시 강조했다. 람야이에게 들으라는 듯이.
“앞으로 물건 셀 때 똑바로 세 주세요.”
그때 나는 람야이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봤다. 흩어지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람야이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다.
일이 끝난 후 관리자 휴게실은 시끌벅적하다. 다들 조끼를 사물함에 넣고 옷을 갈아입으며 퇴근 준비를 했다. 퇴근 후 뒤처리를 하느라 조금 늦게 나와 사물함에 조끼를 집어넣고 재킷을 도로 입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람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서자 람야이가 샴푸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여기 육팔팔 샴푸 1개.”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이걸 찾았어요?”
“포장장 올라가는 레일 밑에서 찾았어요. 나 거짓말 안 해요.”
그 넓은 이동 레일 밑을 다 뒤졌다고? 놀라운 여자다. 하긴 3년 전 쓰잘데기 없는 배낭을 돌려주려고 파타야에서 방콕까지 온 여자다. 나는 미안해졌다. 람야이는 당당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둘째 날도 잘 마쳤다. 억울한 일이 있었지만 석훈에게 한방을 먹인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서자 동바이는 침대에서 벌써 누워 자고 마랑이 화장대 의자에 앉아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려 화장대 앞에 다가갔다.
“ตั้งใจดูอะไรขนาดนั้น? (뭘 그렇게 열심히 보니?)”
“ไม่มีอะไร. (아무것도 아냐.)”
핸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데 마랑의 핸드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주로 쓰는 소셜 플랫폼 안에는 태국 식당으로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 벽면으로 태국어로 쓰인 메뉴가 보이는데 그 앞에 여러 명의 태국 남자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다들 체격이 좋은 남자들이었다. 마랑은 화면이 깨질 듯 노려보고 있었다.
“รู้จักคนหรอ? (아는 사람들이야?)”
“ไม่ใช่นะ. (아니야.)”
“ว่าแต่ดูทำไมอ่ะ? (근데 왜 봐?)”
마랑이 잠시 대답을 안 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나를 슬며시 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กำลังหาพี่ชายที่รู้จักอยู่. (아는 오빠 찾고 있어.)”
아는 오빠? 나는 눈이 커졌다.
“พี่ชายแถวบ้าน? คุณบอกว่าเป็นลูกสาวคนที่สองของบ้านเกษตรกรรมใช่ไหม? พี่ชายของเพื่อนบ้าน? (동네 오빠? 너 농사짓는 집 둘째 딸이라고 했지? 동네 이웃집 오빠?)”
“ค่ะ. น่าเชื่อถือมากๆเลย. รูปร่างก็ดี แรงก็ดี ถ้าทำนาข้าวสารก็จะยกของหนักๆให้ทันที. ไร้เดียงสาแล้วก็นิสัยดี. มีอยู่วันนึงไม่เห็นและบอกว่าไปเกาหลีเพื่อหาเงิน. (응. 되게 듬직하거든. 체격도 좋고 힘도 좋고 쌀 농사하면 무거운 것도 척척 들어주고. 너무 순진하고 착해. 어느 날 안 보이더니 한국으로 돈 벌러 갔다고 하더라.)”
마랑의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เข้มข้น! มาหาพี่ชายที่ชอบมาที่เกาหลี. (대박이다! 좋아하는 오빠 찾으러 한국에 오고.)”
내가 소리치자 마랑이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말 못 했다.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마랑은 모른다고 했다. 그 후로도 매일 마랑은 태국인들이 애용하는 소셜 플랫폼을 들여다보았다. 열심히 하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요즘 소셜 플랫폼에서 못하는 게 뭐가 있는가?
그때 뒤에서 동바이가 외쳤다.
“ลืมไปเลย! (깜박했다!)”
돌아보자 동바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급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허겁지겁 나오며 소리쳤다.
“จองตั๋วคอนเสิร์ตดาราของฉัน! (내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
“อะไรเนี่ย? (뭐야?)”
내가 묻자 마랑이 동바이가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 그룹 콘서트 표 예매하는 날이라고 알려줬다. 굉장히 경쟁이 심해서 피 튀기는 전쟁이라고 불린단다. 동바이가 옆으로 와서 급한 얼굴로 부탁했다.
“พวกนาย! พวกนายก็ทำด้วยสิ! มันเป็นคำสั่งของเจ้าหญิง! (얘들아! 너희도 해줘! 공주의 명령이야!)”
나는 머뭇거렸지만 마음씨 착한 마랑은 대번에 좋다고 대답했다. 할 수 없이 나도 한다고 했다. 동바이가 가르쳐 준 대로 핸드폰으로 예매 사이트에 접속해 들어갔다. 티켓값이 엄청 비쌌다. 내게는 엄두도 내기 힘든 돈이었다. 그러나 동바이는 공주니까...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접속했지만 화면은 빙빙 돌기만 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접속에 성공해 예매했다.
동바이가 나를 껴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ในที่สุดก็ได้เจอกันแล้ว! สตาร์ของฉัน!! (드뎌 본다! 내 얘들!!)”
셋째 날도 하루 종일 무거운 물건들을 집고 날랐다. 그런데 조금은 더 익숙해진 것 같다. 대용량 과자 섹션에서 과자 박스를 집고 있는데 ‘뒤에서’ 푸드덕 소리가 났다. 놀라 돌아보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박스 위에 앉았다.
“นกพิราบ! (비둘기닷!)”
여긴 개방형 창문이니까 그 사이로 들어왔나 보다. 이런 곳에서 비둘기를 만나다니. 얼굴은 빨개지고 숨은 차고 이마에선 땀이 흘러내렸지만 허리를 펴고 비둘기를 봤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뒤에서 석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둘기한테 마구 먹이 주고 그러면 안 됩니다.”
얄밉게 무슨 말이야... 내가 휙 돌아서 보니 눈앞에 분홍색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이 하나 쓱 들어왔다. 석훈이 내밀고 있었다.
“받으세요.”
“나 먹어요?”
석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순간 그의 하얗고 준수한 얼굴에 눈앞이 분홍색으로 사랴락 변했다. 내게 마음이 있는가? 얼굴이 발그레 해져서 손을 내미는데 그때 들리는 무심한 석진의 말소리.
“초콜릿 포장지 뜯어진 게 있어서...”
김이 팍 샜다. 그러나 손바닥 위에는 벌써 예쁜 초콜릿이 올라와 있었다. 석훈이 돌아서 나가는데 포장이 뜯어진 초콜릿 봉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잠시 후 건너편 칸막이 너머에서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저 주시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세련된 서울 말씨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나한테만 줬을 리가 있나! 그래도 작업 장갑을 벗어 초콜릿 껍질을 벗겨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미소가 지어졌다. 초콜릿 껍질을 주머니에 넣고 장갑을 다시 끼려고 손바닥을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그런데 손바닥에서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났다. 왜 익숙한 것 같지?
초콜릿을 다 돌리지 못하고 하나가 남아 컴퓨터 모니터 옆 데스크에 올려 두었다. 잠시 모니터로 알고리즘을 확인하는데 지석이 들어왔다. 얼른 화면을 지웠다.
“다 돌렸어요?”
“네. 매니저님은 갑자기 초콜릿을 돌리라고. 하하”
지석이 나에게 얘기하면서도 웃었다.
“포장 뜯어진 거 그냥 버리기 아깝잖아요.”
내가 말하는 사이 지훈이 자기 컴퓨터 앞에 서며 주머니에서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몰래 책상 밑 휴지통에 버리는 걸 봤다. 못 본 척, 모니터로 다시 얼굴을 돌리는데 멀리서 지혜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일하기 편한 복장인데 혼자 세련된 명품 옷차림이라 유독 눈에 띈다.
스커트를 하늘거리며 내 앞에 와 섰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외국인 사원 명단 말인데요...”
내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지혜의 얼굴이 환해졌다. 모니터 옆에 둔 초콜릿 하나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이거 저 주시려고요?”
잠깐! 뭘 생각하는 거지? 휙 머리를 돌렸다. 세상 편하게 가자!
“아, 예.”
남은 초콜릿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가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외국인 사원의 적정한 배치를 요구하는 동안 지혜는 초콜릿 포장을 벗겨 입에 넣고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 뒤로 산처럼 쌓인 집품 박스를 쌓은 대용량 카트를 끙끙 끌고 지나가는 람야이가 보였다. 람야이도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