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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Oct 06. 2024

11화. 샴푸 하나 덜 넣었죠?


바닥에서 겨우 털고 일어나 통로 끝까지 가서 레일 위에 집품 박스들을 올렸다. 통로 끝 개방형 창 밖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다시 PDA에서 집품 시작을 누르는데 화면이 넘어가지 않았다.      


레일 옆에는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은 빨간 머리 여자가 나처럼 PDA를 들여다보다가 카트는 내버려 둔 채 통로 쪽으로 그대로 나갔다. 나도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석훈의 컴퓨터와 데스크가 있는 관리자석이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카트를 끌며 나와 모여들었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략 40명의 남녀노소 한국인, 외국인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들 나처럼 지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나만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거의 혼이 빠진 것 같았다. 파란색 조끼를 입은 석훈과 함께 있던 녹색 조끼를 입은 또 한 명의 관리자가 PDA를 돌려받았다. 반납이 끝나자 석훈이 앞에 선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퇴근하실 때 뛰지 말고 걸어가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출입구 쪽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어 나갔다. 내가 어쩔 줄 몰라 서 있는데 석훈이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동바이님! 마랑님!”     


앞에서 뛰어 나가던 레일 옆에서 본 빨간 머리 여자와 또 다른 여자가 돌아보더니 ‘네?’ 하고 대답하며 다가왔다. 한국 아이돌처럼 힙한 차림이었다. 내가 무슨 일인가 힙한 차림의 그녀들을 살피는데 석훈이 나를 가리켰다.     


“태국에서 오신 분이세요. 기숙사로 데려가세요.”     


석훈이 빠르게 내뱉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눈이 커진 건 동바이와 마랑이었다. 둘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첫인상 때 기죽으면 안 된다. 나도 눈에 힘을 주고 마주 봐줬다.  

   

“สาวบ้านนอกมาจากไหน? (어디서 온 시골년이야?)”     


머리가 빨간 동바이가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검은 머리 마랑이 동바이의 팔뚝을 툭 쳤다.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듯. 나는 침착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พัทยาไม่ใช่ต่างจังหวัดนะ (파타야는 시골 아니야.)”     


내가 대답하자 동바이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마랑이 내게 짐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인사부 사무실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대답했다.      


“เหนื่อยจะตายอยู่แล้ว ไปถึงแผนกบุคคลแล้วต้องไปหอพักหรอ? นังบ้า! (힘들어 죽겠는데 인사부까지 갔다가 기숙사 가야 해?? 미친!!!)”     


동바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짜증을 냈다. 우리는 인사부까지 가서 내 트렁크를 찾은 후 건물을 나왔다. 기숙사는 센터 건물 뒤 가까운 곳에 있었다. 50 개쯤 방이 보이는 큰 건물이었다. 기숙사 가는 길에는 걸어가거나 스쿠터를 타고 오가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우리처럼 센터 건물을 나와 기숙사를 가는 외국인들과 기숙사를 나와 센터 건물로 가는 외국인들이었다.      


마랑은 지금 기숙사를 나와 센터 건물로 가는 사람들은 야간 근무를 하러 가는 거라고 알려 주었다. 빨간 머리에 힙한 옷차림으로 짜증만 내는 동바이랑 달리 마랑은 내 트렁크도 밀어주며 참 친절했다. 힘든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나는 트렁크를 끙끙거리며 끌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기숙사 방문을 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2층 침대 4개가 양편으로 있고 가운데 작은 테이블과 네 개의 의자가 있었다. 한쪽으로는 4개의 옷장과 하나의 화장대가 있고 구석에는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다. 파타야에서 엄마, 동생과 함께 쓰는 방보다 크고 좋았다.      


내가 탄성을 올리자 앞에서 신발을 벗고 있던 동바이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그러나 안으로 성큼 들어온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 테이블 위와 의자, 바닥에는 옷가지들과 잡동사니들로 널려 어지러웠다. 신발을 벗고 바닥으로 들어서는데 동바이의 얄미운 목소리가 들렸다. 

    

“เด็กใหม่! ทำความสะอาด! (야 신입! 청소해!)”     


동바이가 아래 침대에 벌렁 누운 채 내게 명령하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나에게? 기가 막혀서 동바이를 보다 도움을 청하듯 마랑을 돌아봤다. 마랑은 못 들은 척, 맞은편 자기 침대로 가고 있었다. 내가 동바이를 노려보자 그녀가 더 크게 소리쳤다.      


“เจ้าหญิงไม่สามารถทำความสะอาดห้องได้นี่! นายต้องเป็นคนทำสิ! (공주가 방 청소할 수는 없잖아. 새로 들어온 니가 해야지!)”     


“เจ้าหญิง? (공주?)”     


“ดูนั่นสิ! (저기 봐!)”     


동바이가 손가락으로 화장대 거울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사진이 5장쯤 붙어 있는데 태국 국왕과 가족들 사진이었다. 웬 국왕 사진?! 나는 눈이 커져 사진 앞으로 다가가 들여다봤다. 마랑이 옆에 와 설명해 주었다.      

“เป็นรูปที่ดงไบอายุ 10 ขวบ. (동바이 열 살 때 사진이야.)”      


국왕 가족사진 속에 어린 동바이의 얼굴이 보였다. 태국 왕족답게 황금색 예복을 입고 머리에 황금 모자를 쓴 10살 소녀.      


“เจ้าหญิงใช่ไหม? (공주 맞지?)”     


마랑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어린 동바이를 쳐다보는데 나는 믿을 수 없었다.  

    

“เจ้าหญิงมาเกาหลีทำไม? (공주가 왜 한국 왔어?)”     


마랑이 말을 못 했다. 동바이를 쳐다보자 그녀가 거만하게 말했다.    

  

“ไม่จำเป็นต้องรู้. ถ้ารู้ว่าฉันเป็นเจ้าหญิง ก็ทำความสะอาดซะ! (알 것 없어. 나 공주인 거 알았으면 청소 좀 해!)”     


동바이가 벌렁 침대에 도로 누웠다. 씩씩거리며 동바이를 노려 봤는데 마랑이 침대 옆 구석에 있는 청소기를 가리켰다. 어쩔 수 없다. 처음부터 한 방을 쓰는 동료들과 싸움을 할 수는 없다.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불도 다 꺼지고 어두운 방, 2층 침대에 누우니 천장이 가깝다. 그래도 창에서 비껴오는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아래에서는 동바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힘든 하루였다. 너무 피곤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고향의 엄마와 동생들도 내 소식이 궁금할 것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동생들한테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น้องสาว - พี่คะ เกาหลีเท่ใช่มั้ย?' (여동생 – 언니 한국 멋있지?)’ 

‘ฉัน - ชอบมากเลย (나 – 응, 너무너무 좋아.)’ 

‘น้องชาย - เห็นแบล็คพิงค์มั้ย? (남동생 – 블랙 핑크 봤어?)’ 

‘ฉัน - อย่าเพิ่ง เดี๋ยวเราก็เจอกัน. (나 – 아직, 곧 볼 거야)’      


이제 자야 한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누우니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어 아침 6시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날 수 있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을 대충 먹고 동바이, 마랑과 함께 센터 건물로 향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었고 센터 바깥에서도 셔틀버스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동바이, 마랑을 따라 출근 체크를 하는 6층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양쪽으로 거인처럼 서 있는 건물 사이 커다란 통로에는 연이어 셔틀버스들이 들어서 사람들을 쏟아 냈다. 나는 거대한 건물과 많은 사람들에게 압도당하는 듯했다.      


내가 이런 사람들 속 일원이라니! 이렇게 큰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동바이와 마랑은 익숙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출근 체크 구역으로 갔다. 어제 받은 신분증으로 출근 체크를 하고 핸드폰을 배정받은 사물함에 집어넣었다. 여기는 일할 때 핸드폰을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วันนี้ก็ชั้น 2 สินะ. (오늘도 2층이네.)”      


동바이가 핸드폰을 사물함에 집어넣으며 짜증을 냈다.    

  

“ชั้นสองยังไง? (2층이 어때서?)”     


“มีของหนักๆเยอะที่สุด. (제일 무거운 물건이 많아.)”     


마랑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마랑이 없으면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관리자 석에는 파란 조끼를 입은 석훈과 녹색 조끼를 입은 잘 생긴 한국 남자가 서 있었다. 녹색 조끼를 입은 남자에게 동바이가 손을 살짝 흔들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기필코 잘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처음 간 섹션에는 과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출발이 좋았다. 가벼운 과자 박스라니. 가뿐히 들고 박스를 들어 PDA로 바코드를 찾아 찍었다. “삑! 성공!” 경쾌한 기계음이 울렸다. 상쾌한 출발이었다. 집품 박스에 과자를 넣고 PDA가 시키는 대로 다음 섹션으로 가니 10 키로 쌀포대였다. 무거웠지만 힘차게 들어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음료 캔 24개 묶음, 세탁 세제 3리터 4개들이 박스, 분유 8통 들이 박스, 5킬로 강아지 사료 등등 그리고 도돌이표로 다시 반복, 그렇게 물건들을 집품 박스에 넣기도 하고 카트에 대용량으로 쌓기도 했다. 무거운 카트를 끌고 파타야 넓은 시장을 20 바퀴쯤 도는 만큼 돌자 점점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찼다.      


점심을 먹고 숨을 돌린 후 오후에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오후 4시가 넘어 되자 허리와 다리가 아프고 거의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다. 멀리 관리자 석에선 석훈이 편하게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석훈     


17시 마감 시간이 5분 남았는데 무전기에서 포장장 매니저의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386 집품 박스 아직 안 왔습니다. 386박스! 386 박스!’     


하루 3번 마감 시간마다 사고가 안 난 적이 없다. 다행히 지석이 옆에 있어 386 박스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지석이 관리자 석을 나가면서 소리쳤다.     


“매니저님! A3 구역 통로에 박스 쌓여서 치워야 해요. 사원들 넘어진대요.” 

    

어휴! 내가 박스까지 치워야 하는가?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선 아무도 내가 임원인 걸 모른다. 이때 또 무전기에서 다급한 소리가 쳐 나온다.      


‘집품 박스 668 샴푸 하나 모자란다. 샴푸 하나 모자란다.’ 

    

제기랄! 사고는 한 번만 오는 때가 없다. 어쩌라고!      


“마감 5분 전인데요.”     


당장 무전기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직접 가지고 포장장으로 오십시오. 직접 가지고 포장장으로 오십시오.”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병현이 형이랑 만든 프로세스다. 내가 지킬 수밖에. 무전기를 끄고 대꾸는 해 주었다.     


“야! 내가 여기 상무다. 어디서 명령질이야!”    

 

샴푸 섹션으로 달려가 얼른 하나를 집어 한층 위 포장장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포장장 매니저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숨을 헉헉거리며 샴푸를 건네자 그는 앞자리 작업대 노동자에게 샴푸를 건네며 포장을 시켰다.     


내가 돌아서는데 뒤에서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 이딴 식으로 할 거예요? 나 지금 경위서 쓸 뻔한 거 못 봤어요? 이 따위로 일 할 거예요?”     


얼굴이 빨개져서 포장장 매니저가 소리쳤다.      


“사원이 실수한 걸 내가 어떡합니까?”     


“관리자가 잘 못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욱’ 하려다가 참았다. 내가 만든 규칙이니 내가 지킬 수밖에! 자리에 돌아와서 누가 집품했는지 찾아봤다. 


내가 만든 알고리즘은 거의 완벽하다. 하나의 집품 박스를 중심으로 누가 집품했는지, 누가 포장했는지, 어떤 고객에게 갔는지 일련의 프로세스가 다 파악이 된다.      


람야이였다. ‘욱!’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따로 불러 야단칠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 순간 람야이가 내 눈 앞에 나타난 게 잘못이다. 대용량 카트에 물건을 산처럼 실은 채 끙끙거리고 카트를 끌며 관리자석 옆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 앞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카트를 놓고 돌아서는 걸 결국 불러 세웠다.     


“사원님!”     


람야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다가왔다.    

  

“688 박스에 샴푸 하나 덜 넣었죠?”     


“네???”     


그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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