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훈의 얼굴이 불만스러웠다. 갑자기 마음이 움츠러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처음부터 기가 죽어지내면 안 된다. 나도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와 나의 눈빛이 맞부딪혔다.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린 것 같기는 하다. 그때 지혜가 끼어들었다.
“석훈님! 저 잠깐 보세요.”
지혜가 관리자 석 안으로 들어가 석훈 옆에 서서 손을 입으로 가리며 작은 소리로 뭐라고 속삭였다. 나는 궁금해졌다. 얘기를 들은 석훈의 얼굴을 더 험악해졌지만 지혜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입을 다물고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 된 것 같다.
고개를 들어 나를 흘낏 보는데 지혜가 관리자 석에서 나와 굳은 얼굴로 있는 나에게 다가와 웃어 주었다.
“열심히 하세요!”
지혜 이사는 참 친절한 한국 사람인 것 같다.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녀, 불철주야로 분골 쇄신하겠습니다!”
지혜 이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고 맞은편에 있는 석훈의 눈은 커졌다. 한국 드라마에서 배운 대로 최고의 예의를 표하는 말을 썼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컴퓨터 앞에 서 있던 석훈이 나와 내 앞에 서며 말했다.
“네. 분골쇄신하세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 퉁명스러운 말투다. 지혜 이사가 ‘수고하세요!’ 말하고 떠나갔다. 석훈이 컴퓨터 옆 데스크 위에 둔 핸드폰 같은 걸 집더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석훈을 따라 물건이 쌓여 있는 칸막이로 갔다. 큰 통에 든 세탁 세제, 커다란 과자 상자, 여러 개가 들은 샴푸 박스, 10 키로 짜리 쌀 봉지가 칸칸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카트를 끌고 다니며 물건들을 집어 카트 위에 놓인 박스 안에 넣었다.
사람들이 참 다양했다. 인종도 다양하지만 한국 사람들도 다양했다. 한국 티브이 프로에서 본 대로 입은 아이돌스러운 힙한 옷차림, 빨갛고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사람들, 귀와 입에 피어싱을 한 남녀들, 그리고 피부색이 다양한 외국 노동자들. 나는 석훈을 쫓아가며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참 여러 모양입니다.”
석훈은 들은 채도 안 하고 바쁘게 앞서 가기만 했다. 내 말을 못 들었을까 봐 빨리 걸어 그의 옆에 서서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 전에 본 적 있죠?”
말이 없다.
“그렇죠?”
내가 다시 물었다.
“없어요.”
그가 화난 듯이 대답했다. 움찔하는데 그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눈앞에 카트가 몇 개 나란히 있고 박스가 차곡차곡 높이 쌓여 있었다. 그가 박스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이건 집품 박스예요. 이렇게 카트 위에 올려야 합니다.”
석훈이 쌓여 있던 네모난 박스 하나를 집어 들더니 옆에 있던 카트 위에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 같이 생긴 걸 꺼내면서 내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건 핸드폰이 아니라 PDA에요. 이게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나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다.
“참 한국어 읽을 수 있어요?”
자신 있게 대답해 줬다.
“네! 한국어 시험 7 등급 땄어요.”
그의 눈이 잠시 커진 것 같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리더니 집품 박스 옆 면에 있는 바코드에 PDA 버튼을 누른 후 화면을 다시 내게 보여 줬다.
“에이 쓰리 (A3) 구역이라고 나오지요. 그 구역으로 가라는 겁니다.”
“에이 쓰리가 어디 있어요?”
내가 키가 큰 석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약간 흔들린 것 같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약간 반짝인 것도 같다. 그가 눈을 움찔하더니 손가락으로 한 곳의 칸막이를 가리켰다. 그 위에 ‘A3’라고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저기요!”
그가 앞장서 우리는 A3 집품 섹션에 도착하자 칸막이 안에 과자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크기는 컸지만 그다지 무거워 보이진 않았다. 석훈이 과자 박스 하나를 들더니 박스에 있던 바코드를 PDA로 찍은 후 화면을 보여줬다. 화면 안에 상품 이름과 사진이 뜨고 ‘집품 3개’라는 명령어가 떠 있었다.
“이 상품 3개를 집품 박스에 넣으라는 얘기예요.”
“이해 하옵 사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그런 조선어를 써요? 이래서 일 잘할 수 있겠어요?”
그가 다시 화를 냈다. 내가 잘못했나? 잠시 얼굴이 굳어 아무 말 못 했다. 그러자 석훈의 얼굴이 풀어지더니 미안한 얼굴이 된 것 같다.
“일 시작하세요!”
그의 어투가 부드러웠다. PDA를 나에게 넘기더니 바쁘게 돌아서 가 버렸다. 이제 시작이다! 지난 3년간 준비하며 이때를 기다려 왔다! 잘 해내야 한다! 나는 두 손에 주먹을 쥐고 ‘파이팅!’ 한 후 과자 상자를 집기 시작했다.
다른 과자 상자를 들어 PDA로 바코드를 찍었다. 그런데 ‘삐! 실패!’ 소리가 나며 PDA 화면이 넘어가지 않는다. ‘뭐가 잘못 됐나?’ 다시 한번 PDA로 찍었다. 그러나 다시 ‘삐! 실패!’ 소리가 났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뭘 잘 못 했나? 열 번이나 더 찍었고 다시 열 번 ‘삐! 삐! 실패!’ PDA가 나를 비웃었다. 막막해졌다. 왜 이 물건들은 나를 거부하는가? 내가 한국에 온 게 그렇게 싫은가? 나는 한국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한국에 잘 못 온 것인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때 마침 뒤로 한국인 하나가 카트를 끌며 지나갔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해요?”
그가 무슨 얘기냐는 듯 쳐다봤다. 한국어 발음이 안 좋은가? 다시 물었다.
“이거 어찌하옵니까?”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큭큭. 잘해봐요.”
한국인이 그냥 지나갔다.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아프리카 사람이 지나갔다. 같은 외국인에게 물어보는 게 더 나으려나?
“이거 어떻게 하나요?”
아프리카 사람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못 알아들은 것 같다. 아프리카 사람도 그냥 모른 채 지나갔다. 나는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때 석훈이 저쪽 통로를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내가 얼른 그에게 외쳤다.
“안 돼요!”
울상으로 소리치자 그가 쳐다보더니 대번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뭐가요?”
“기계가 안 돼요!”
“그게 말이 됩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됐는데...”
그가 다가오자 나는 상자 하나를 들고 PDA로 바코드를 찍는 걸 보여줬다. 역시 ‘삐! 실패!’ 소리가 나며 찍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게 아니에요!”
그가 얼른 상자를 집어 돌리더니 다른 면에 있는 바코드를 찾아 거기에 PDA를 찍었다. ‘삐! 성공!’하는 소리가 PDA에서 경쾌하게 울려 나왔다. 신기했다. 내가 할 때는 안 되더니 무슨 일인가!
“바코드가 여러 개 있는 상품도 있어요. 아시겠어요?”
석훈이 나를 쳐다보는데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가 칸막이 사이 통로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저기로 박스 옮기세요.”
기찻길 같은 작은 레일이 보였다. 레일 위에는 집품 박스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사람들이 옆에 서서 카트에서 집품 박스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품 박스를 레일 위에 올리고 다시 pda가 시키는 대로 음료 캔 24개 묶음, 세탁 세제 3리터 4개들이 박스, 분유 8통들이 박스, 5킬로 강아지 사료 등등 그리고 도돌이표로 다시 반복, 그렇게 물건들을 집품 박스에 넣기도 하고 카트에 대용량으로 쌓기도 했다. 허리가 휘청거리고 얼굴이 점점 빨개지며 숨이 차기 시작했다.
10 키로 쌀포대 구역에 갔을 때였다. 한 봉지를 집어 카트 위에 얹는데 허리가 휘청일 만큼 무거웠다. 그때 ‘17시 마감 맞추세요! 17시 마감 맞추세요’ 하는 무전기 소리가 들리며 급하게 뛰는 소리가 다가왔다. 석훈이 나타났다.
“왜 이렇게 느려요?”
말할 힘도 없었다. 계속 쌀포대를 옮기며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서서 쳐다보았다. 그러자 석훈이 내 옆에 서서 쌀포대를 들어 퍽퍽 집품 박스 안에 던지듯 넣었다.
“오늘 처음 온 외국인을 나한테 밀어 넣고 말이야!”
화난 얼굴이어서 나는 다시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굳은 얼굴이 되어 쳐다보는데 그가 소리쳤다.
“빨리빨리 하세요.”
‘빨리! 빨리!’ 많이 들은 무서운 한국말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송출 업체에서 사장님이 이런 말을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 줬다. 나는 얼른 쌀포대를 들어 대용량 카트 위에 얹었다.
곧 카트 위가 가득 차고 석훈이 허리를 펴고 나에게 눈에서 불을 내듯 화를 냈다.
“마감인데 너무 느리잖아요.”
아무래도 내가 일을 잘 못하는 것 같다.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고개를 숙여 감추었다.
“관리자 석 옆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 앞으로 옮기세요.”
석훈의 말투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 고개를 들자 그가 벌써 돌아 나가고 뒷모습만 보였다.
나는 얼른 카트를 잡고 칸막이를 나와 통로로 걸어갔다. 그러나 철퍼덕 바닥에 넘어졌다. 카트가 너무 무거워 바퀴가 제멋대로 돌아 걸려 넘어졌다. ‘아얏!’ 무릎이 아팠다. 처음 와서 일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넘어지기까지 하다니. 한국은 진짜 힘든 곳이구나. 아픈 무릎을 문지르는데 서러움이 목을 차고 넘어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