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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Oct 23. 2024

18화. 감히 외노자 주제에 대꾸를 하네.

  

다음날은 휴일이라 동바이는 지석과 데이트를 하러 나갔고 나는 기숙사 방을 청소기로 밀고 있었다. 마랑은 평소처럼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더니 환호성을 올렸다. “찾았다!”     

마랑이 보던 핸드폰 돌려 내게 화면을 보여 줬다. 화면 안은 허름한 태국 식당 안. 한쪽 테이블에 여러 명의 태국 사람들이 웃으며 둘러앉아 있었다. 남자 네 명쯤이 둘러앉아 있는데 테이블 위엔 태국 음식과 소주가 어지럽게 놓여 있였다. 마랑이 사진을 키우더니 그중 한 명을 가리켰다.     


“คนนี้ดูเหมือนพี่สุชัยเลย. รูปร่างหลังคล้ายๆกัน เห็นไฝใหญ่ๆตรงนี้มั้ย? นี่เป็นจุดเด่นของพี่เลยนะ. (이 사람 숫차이 오빠처럼 보여. 등판이 비슷하고 여기 커다란 점 보이지? 이게 오빠 특징이거든.)”     


얼굴이 빨개져서 흥분한 목소리였다.     


“ใช่แล้ว? (진짜야?)”     


마랑의 얼굴이 너무 간절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밑에 식당 이름하고 위치가 나와 있었다.   

    

“เป็นร้านอาหารในอันซาน. ที่นั่นมีคนไทยอยู่เยอะไม่ใช่หรอ? (안산에 있는 식당이야. 거기 태국 사람들 많이 살지 않니?)”     


내가 묻자 마랑은 대답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ต้องไปแล้วล่ะ! (가야겠어!)”     


마랑은 이런 여자가 아니다. 진짜 순하디 순한 여자이다. 한국에 올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나야 식당도 하고 용감한 여자지만 마랑은 소극적이라 한국에 올 용기도 없었을 거다. 그런데 동네 오빠를 진짜 좋아했나 보다. 나는 마랑이 걱정되어 따라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안산의 태국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허름한 식당 사장님은 태국인이었다. 우리가 사진을 보여주며 묻자 뒷목에 이렇게 큰 점이 있고 우락부락한 팔에 용 문신이 있는 남자를 금세 알아보았다. 최근 한동안은 뜸했지만 전에는 식당에 자주 오던 사람이었다고. 근처 공장에서 일한다고 알려 주었다.     


안산 외곽 공장 지대는 삭막했다. 나무 한그루 없이 지저분한 시멘트 공장 건물들만 늘어서 있었다. 여기저기 구석에는 정리된 흔적 없이 산업 폐기물만 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공장 건물 안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 일하는 시간이라 공장 문을 열고 물어보기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열어 보았다. 공장 안에서는 사람들이 부산하게 일하고 있었다. 거의 외국인들이었다. 겨우 지나가는 남자 하나에게 숫차이를 아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그가 귀찮은 듯 그냥 지나갔다. 

    

그렇게 세 개쯤 공장 문을 열고 물어보았다.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외국인이었다. 세 번째 문을 연 공장은 철재 제품을 다루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 역시나 지저분한 작업장에서 외국인들이 무거운 철재 제품을 들어 옮기거나 눈앞에 보호 안경을 쓰고 용접을 하고 있었다. 철제 싱크대를 들고 문으로 나오는 남자에게 겨우 말을 붙였다.    

 

“태국 남자 찾아요. 숫차이 있어요?” 

   

내가 소리치자 마랑이 옆에서 덧붙였다.


“힘이 좋고 착한 태국 남자요. 뒷목에 점이 있어요.”     


“숫차이? 태국 남자?”     


철제 싱크대를 든 남자가 어눌한 한국말로 말하며 안다는 얼굴이었다. 마랑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회사 그만해. 육 달 전에.”     


남자가 손가락을 6개를 펴서 올려 보여 주었다. 내가 어디 있냐고 묻자 남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모른다고 표시했다. 우리가 실망해서 돌아서려는 순간 다른 남자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어눌한 한국말로 소리쳤다.      


“숫차이! 불법! 불법!”     


우리는 놀라 쳐다보았고 곧 마랑은 크게 실망하였다. 결국 기숙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석훈     

관리자 휴게실 창으로는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앞에서는 출고 총괄 부장이 평소처럼 근무 시작 전 간단한 지시를 했다. 회사 상무이기는 하지만 내 얼굴을 아는 이들은 회사 임원들과 본사 IT 팀 매니저급 들뿐이다. 대부분 강남 본사 건물에 있었고 나는 경기도 구석 센터로 와 이곳 사원들은 나를 거의 모른다.     

 

더구나 병현이 형이 임원 회의에서 나의 위치를 비밀로 하라고 지시해서 임원들은 입을 봉하고 있었다. 가끔 지석과 같은 부매니저에게 통로에서 박스 더미 치우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니 상무다’라고 속으로 소리치지만 그런 시스템도 내가 만든 거라 그냥 쓰레기를 치운다.      


오늘 총괄 부장은 심각한 얼굴이다.      


“어제 100건 정도 배송 지연 사고가 있었어요. 오늘은 본사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모여 있다고 하니까 그런 사고 없어야 합니다. 갑자기 점검 나올지도 몰라요. 알겠어요?”     


람야이가 집품장 B 구역에서 일하는 걸 본 건 야식 시간도 끝나고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관리자석 컴퓨터로 데이터도 보고 알고리즘도 틈틈이 확인하는데 멀리서 요란한 발소리가 밀려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자 ‘뭐야! 이거 어휴 지저분해!’ 짜증을 부리는 스티브가 부하 직원 세 명쯤과 함께 여기저기 둘러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옆에는 지혜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오며 ‘즉각 시정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스티브는 재수 없는 얼굴에도 고급 명품 슈트 차림이어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부하들과 지혜를 거느린 스티브가 연신 코를 킁킁거리고 내 앞에 섰다.    

 

“여기 왜 이렇게 지저분해요? 상무가 돼서 이런 거 정리 안 시켜요?”     


그가 양복바지를 털며 씨불 거리자 지혜가 얼른 입을 가리며 속닥거렸다.     


“여기 사원들은 상무님이 상무님인 거 모르세요.”     


스티브가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명품 양복 재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큰 배를 꼬아 보며 물었다.     


“뭡니까?”     


“지금 그 눈빛은 어디 파티장에서 놀다 왔냐? 그거예요?”   

  

그렇다. 새끼야! 대답은 안 하고 컴퓨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일하다 온 거예요.”     


“저희 외국인 투자자 파티하다 왔습니다.”     


지혜가 설명을 덧붙였지만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비꼬아 주었다.


“그럼 쭉 비즈니스 하지 왜 오셨어요?”     


스티브가 발끈해서 나섰다.      


“내가 걱정이 돼서. 정말. 내가 투자자 비즈니스만 열심히 하면 뭐 합니까? 진짜 비즈니스를 잘해야지. 기록 보니까 요즘 집품이 너어어무 느리더라고! 늦어도 너어어무 느려? 일 제대로 안 해요?”     


스티브가 혀를 꼬며 강세를 줬지만 내 탓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겠다.   

   

“자정 마감 맞춥니다.”     


그때 지혜가 작은 소리로 내 편을 들어주었다.    

  

“상무님은 아이티 작업도 같이 하시니까.”    

 

“그렇다고 맡은 일 안 하면 됩니까? 임원 회의 때 분명히 잘하겠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지요. 못하면 회사 그만둔다고.”     


“마감 맞춘다고요.”     


스티브의 말이 길어지길래 차갑게 끊어 주었다.  

    

“그래요? 한번 봅시다. 참 내가 감사로서 너어어무 열심히 일한다. 내 한번 지켜봅니다”    

 

스티브가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서 있자 지혜가 안절부절못하더니 관리자석 앞에 있는 허름한 비닐 천막 휴게실로 안내했다. 안에는 플라스틱 간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는데 스티브가 그걸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부하가 당황해서 얼른 수건을 꺼내 의자를 닦자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부서지게 거만하게 앉는데 뭘 어쩌자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품 상황을 체크하려고 B 구역으로 가려다 휴게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회사 생각하시면 가만히 있지 말고 일하시죠.” 

    

“무슨 일?”


“여기 지저분하다면서요?”     


스티브가 의문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일 손 거드셔야죠. 통로에 버려져 있는 박스 쓰레기 좀 주우세요.”     


스티브가 섹션 사이 통로에 쌓여 있는 박스 쓰레기를 힐끗 보더니 못 볼 걸 봤다는 것처럼 얼굴이 구겨졌다.      

“저 저걸? 내 내가? 미 미쳤어? 이 구두로?”     


말을 버벅거리며 자신의 반짝거리는 구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당연히 우리끼리는 알아보는 최고급 유럽 명품 구두였다.      


“네. 여기 규칙이에요. 통로에 쓰레기 있어서 일하는 데 지장이 되면 청소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치워야 합니다. 그게 싫으시면 다른 사원들처럼 카트 끌고 가서 세재 박스들 좀 담으시던가. 마감 치기도 바쁜데.”     


그가 얼굴이 붉으락해지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천막 비닐 너머로 보이는 산처럼 쌓인 세재 박스, 쌀포대, 과자 박스들을 휘휘 돌아보더니 소리 질렀다.     


“여기 물건들 다 합쳐도 내 구두 못 사요. 구두 망가지면 책임질 수 있어요? 책임질 수 있냐고?”     


“그렇게 아까우시면 구두 벗고 맨발로 주우세요.”     


침착하게 대응해 주자 스티브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졌다.


“저, 저 새끼가!!”    

 

“아니다. 맨발은 안 되겠다. 다치니까 양말 꼭 신고 주우세요. 발 다치면 회사 돈으로 치료해 줘야 하니까.”     

너무 기가 막힌 지 스티브가 말도 못 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주먹을 쳐들었다. 나는 예의 있게 못 본 척하고 돌아 섰다.      


“전 이만 마감 맞추러 가야 해서.”      


천막을 나오는데 지혜가 당황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일단 람야이가 있는 곳으로 가자!     


람야이는 3리터 4개들이 세재 박스를 대용량 카트에 싣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져서 숨을 헉헉거리고 있다. 매번 무거운 일은 람야이에게 가는 것 같다. 아니다. 내가 짠 알고리즘이 시키는 일인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니.      


“빨리빨리 좀 합시다!”     


말하며 얼른 람야이 옆으로 가 박스를 들었다. 람야이가 힐끗 봤지만 손을 멈추지는 않는다. 2달이 되어가니 람야이 속도가 빨라서 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나도 숨이 차 가는데 주머니에 꽂아둔 무전기에서 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포장장. 여기는 포장장. 마감 100건 안 왔다. 마감 100건 안 왔다.”     


“지금 하고 있다고!”     


소리 질러 주었지만 계속 무전기는 급하게 ‘마감 100건. 마감 100건’을 외쳤다. 이때 통로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티브와 지혜가 나타났다. 지석이 데리고 온 것 같다.      


“또 마감 못 맞추겠네. 마감 못 맞추면 우리가 얼마나 배상해야 되는지 알아요?”     


스티브가 씨불거렸지만 나는 대답도 안 하고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서 람야이가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스티브가 람야이에게 소리쳤다.     


“빨리빨리 좀 해요!”     


람야이의 얼굴이 좀 굳은 것 같지만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사이 3리터 샴푸 4개들이 박스 50개가 대용량 카트 위에 산처럼 쌓였다. 가장 위에 마지막 박스를 올린 람야이가 손을 떼며 내게 말했다.      


“다 됐어요.”     


람야이가 카트를 밀고 나가는데 너무 무거워 바퀴가 잘 움직이지도 않는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람야이가 끙 밀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맨날 한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야. 밤 11시에 주문한 물건을 아침 6시에 받는 게 말이 되냐고? 일하는 사람들은 생각 안 하냐고?”     


다 들렸다. 스티브가 람야이를 멈춰 세웠다.     


“잠깐! 동남아 사원! 뭐라 그랬어요?”   

  

람야이가 멈춰 서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하다고요. 너무 빨리빨리한다고요.”     


순간 스티브의 얼굴에 비웃음이 떴다.  

   

“와! 감히 외노자 주제에 대꾸를 하네.”     


순간 나는 마음이 철렁했다. 일단 지석에게 눈짓을 보내 카트를 밀고 가라고 지시했다. 람야이는 기죽지 않고 스티브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 일 날 것 같았다.    

 

“뭐라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일하는 사원입니다.”     


내가 나서자 람야이가 휙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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