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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Oct 25. 2024

19화. 나 좋아해요?

‘왜 나한테 쉴드를 치니?’ 놀라는 눈빛이었다. 스티브 뒤에 있는 지혜도 나와 람야이를 번갈아 보는 것 같았다. 스티브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었다.      


“헐.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서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잘렸어.”     


그의 얼굴이 험악했지만 무서울 건 없다.     


“어디 앞으로 보시죠!”     


내가 대꾸하자 스티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혜가 나서 주었다.      


“감사님! 자정이 넘었습니다. 여기 일은 맡겨 두시고 이제 돌아가세요!”     


“마감 마무리해야 하니까 일 방해하지 말고 가주세요.”     


내가 재촉하자 스티브가 한 발 물러섰다.      


자정 마감은 잘 맞췄다. 새벽 마감까지 이르게 맞추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스티브도 기록은 보고 있겠지.      

람야이는 겁도 없이 왜 스티브같이 사람 앞에 나선 걸까? 그녀는 너무 옳기만 해서 내가 조마조마하다. 빈 카트를 밀고 지나가는 람야이를 불러 세웠다.     


“아까 왜 쓸데없는 얘기 했어요? 잘리면 어쩌려고?”     


람야이의 눈빛이 좀 흔들린 것 같다.      


“외국 사람이니까 말 조심해야 해요.”     


내가 단호하게 일러주었다. 그때 람야이가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왜 나를 구해줬어요?”     


할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말을 할 수밖에.     


“일하러 가세요.”     


컴퓨터 화면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잠시 쳐다봤는데 람야이가 나를 불렀다.     


“석훈!”     


내가 고개를 들자 턱 밑으로 박스 찢어진 조각이 들어왔다. 람야이가 조각을 내 턱밑으로 들이대고는 눈을 작게 뜨고 말했다.      


“이렇게 하니까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우리 혹시 방콕에서 보지 않았어요?”     


“아닙이다. 아니라고요.”     


“정말이에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혹시 람야이 나 좋아해요?”  

    

람야이의 눈이 커졌다.     


“왜 맨날 날 쫓아다니면서 어디서 봤다고 그래요?”   

  

“아니 그건...”     


“너무 그러지 마요. 소문납니다. 동남아 여자가 한국 남자 좋아하면 소문 안 좋게 나는 거 몰라요?”  

   

람야이가 입을 다물더니 돌아서 갔다. 가다가 다시 돌아보더니 한마디 했다.     


“맨날 쫓아다니진 않았어요. 그리고 나 석훈 안 좋아해요.”     


툴툴거리며 돌아서 갔지만 그 모습도 이상하게 귀엽다.      


아무래도 좀 무리하는 것 같지만 임원 회의 때 장담한 스마트 물류 시스템 설계를 3개월 안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다. 야간 근무를 마친 후 대충 한 숨 자고 대형 가전제품 구역으로 나왔다. 오후엔 이곳이 한산해서 일하기 좋다.     


로봇 하나를 데리고 나와 냉장고, 세탁기 같은 제품들이 쌓여 있는 랙 사이의 길이와 너비, 천장까지의 높이 같은 걸 재고 있었다. 그때 스티브가 나타났다. 머리에 수직형 선반 (랙) 5개를 얹은 딱정벌레 같은 로봇 하나와 딱 봐도 엔지니어를 대동하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     


스티브가 다가오더니 내가 데리고 온 ‘윙! 윙!’ 소리를 내며 팔을 움직이고 있는 로봇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유 촌스러워. 아직도 이런 고철을 움직여요? 이걸로 스마트 물류 구축하려고?”     


피식 웃음만 나왔다. 웃어 주지는 못하고 흘낏 스티브를 한번 보고는 로봇을 조정하는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대꾸를 안 하자 답답했나 보다.     


“요즘 누가 저런 무식한 고철을 씁니까? 얘가 머리가 돌아가요?”    

 

기가 막혀서 입을 열었다.   

  

“안 씁니다.”


“뭐라고요?”     


“저거 안 쓴다고요. 그냥 높이 측정하고 있는 거예요.”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스티브가 대동한 랙로봇을 가리켰다.      


“감사님은 이걸 쓰자는 겁니까?”     


그러자 스티브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랙로봇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이게 첨단이에요. 얘가 이렇게 5층 랙 안에 물건을 가득 넣고도 머리에 얹고 씽씽 다닌다고요. 알아서 장애물도 피해 다니고 얼마나 스마트하다고요. 저런 고철 덩어리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     


하더니 내 로봇 다리를 발로 찼다. 펑! 그러나 곧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자기 발을 들고 펄쩍펄쩍 뛴다. 그럼 그렇지! 고철 덩어리를 발로 차며 자기 발만 아프지. 나는 웃음이 나왔다. 큭큭거리자 스티브가 보더니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랙 로봇을 가리키면서 거만하게 물었다.      


“아니! 회사 CTO가 이런 첨단 시스템도 몰랐어요?”     


비웃어 줄 수밖에.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스티브는 함께 온 엔지니어를 인사시켰다.     


“이 친구가 랙로봇 데려왔어요. 김 부장! 한번 보여줘!”     


엔지니어가 손에 든 리모컨을 움직이자 랙로봇이 물건이 가득 든 5층짜리 선반을 머리에 인 채 이리저리 움직인다. 앞 통로에 널브러진 박스를 피하자 스티브가 박수를 쳤다.      


“브라보! 역시 김 부장이 잘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모델인데 이걸 몰라요?”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길래 나도 가소로운 눈으로 대응해 주었다. 


“안 되겠다.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CTO 바꿔야 한다고.”     


“네. 말씀하세요. 이런 후진 모델 잘 말씀해 보세요.”     


“왓?”     


“제가 얼마나 후진지 보여드릴까요? 리모컨 주세요.”     


나는 엔지니어가 손에 든 리모컨을 빼앗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랙로봇이 앞으로 기어가는데 바닥에 패인 구멍이 얕게 나 있었다. 앞으로 기어가던 랙로봇이 구멍에 걸려 앞으로 넘어진다. 그러자 로봇의 머리에 인 랙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스티브와 엔지니어는 눈이 커지며 당황했지만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 모델은 문제가 바닥에 문제가 있으면 인식을 못 한다는 거예요. 물론 바닥 균열 인식하는 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죠. 고칠 수 없는 문제는 이런 식으로 상품을 담은 무거운 랙을 들고 다니면 1년도 안 돼 창고 바닥에 이런 식으로 균열이 생길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안 씁니다.”     


스티브가 잠시 할 말을 잃은 것 같다. 잠시 말을 못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더니 물었다.      


“그럼 다른 아이디어 있어요?”     


답을 금방 하지는 않았다.       


“없구먼. 말 못 하는 거 보니.”     


웃으며 김 부장이라는 엔지니어를 돌아보더니 호탕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이 대표한테도 말해야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아직 나만의 기술 비밀이라 공개하지 않았는데 할 수 없다.      


“제가 정말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 공개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임원들 앞에서 제가 구상하는 거로 서로 대결해 보시죠!”     


스티브의 눈이 커졌다.    

  

내가 생각하는 스마트 물류 시스템과는 미국에서 흔히 쓰이는 랙로봇 형과는 다르다. 건물 시설을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집품 로봇은 가벼워야 한다. 창고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물건을 넣은 선반 (랙)을 천장까지 촘촘히 쌓은 후 랙줄 사이의 공간을 최소화하고 레일을 놓아 가벼운 딱정벌레형 로봇들이 천장까지 위아래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나는 병현이 형과 스티브, 지혜를 포함한 회사 임원들 앞에서 그런 모델을 브리핑했다. 임원들은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고 병현이 형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스티브는 못마땅한 얼굴을 펴지 않았다.     

 

“저렇게 구축하려면 현재 창고 전체를 다 바꿔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비용 어떻게 할 거냐고요?”     


그러자 병현이 형을 비롯한 모든 임원들이 일제히 스티브를 보며 동조하는 눈치였다. 스티브는 신난 얼굴로 열을 올렸다.      


“랙 로봇은 저런 시설 변경 없이 사용할 수 있어요. 선반 랙 지금 창고에 있는 겁니다. 밑에 로봇을 넣는 공간만 만들어 주면 돼요. 비용 절감한다고요.”     


맞는 말이다.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인 구조 조정 없이 경쟁사를 앞서 나갈 수 있을까요? 벌써 경쟁사들은 엄청나게 시설 투자하고 있는데.. 안 그렇습니까?”     


동의를 구하며 병현이 형을 돌아봤다. 그러나 형은 생각하는 눈치로 말이 없었다. 임원들도 조용했고 스티브만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때 나서 준 건 지혜였다. 

    

“상무님 말씀이 맞습니다. 경쟁에서 앞서 가기 위해 적기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지혜가 시작을 해서 그런가 다른 임원들도 여기저기서 하나씩 ‘맞습니다!’하고 동조하기 시작했다. 병현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고 스티브의 얼굴은 빨개졌다. 지혜에게 고마웠다.     


“고마워요”     


회의를 마치고 나가며 지혜에게 인사했다.  

    

“에이! 상무님! 말로만 고마워요? 밥 한번 안 사실 거예요?”  

   

“나중에... 하하.”     


지혜는 나를 따라오더니 이태원 클럽에 가자고 했다.     


“클럽에서 데이트하자고요?”     


지혜가 여유롭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좋고요.”     


‘나중에’라고 대답하려는데 지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상무님! 지난번 한국에 왔던 외국인 투자자 하나가 CTO를 꼭 뵙고 싶어 하세요.”     


이외의 말이라 내가 놀라 지혜를 쳐다봤다.     


“지난번 외국인 투자자 초청 파티에 안 나오셔서. 큰 손으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저한테 함께 이. 태. 원. 클럽에 가자고 하시네요. 아니면 투자 안 하겠다는 뉘앙스예요.”     


람야이     

태국 친구들은 한국에 왔으면 이태원 클럽은 꼭 가봐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사실 나도 호기심이 있었다. 주간 근무 끝나고 다음 날은 쉬는 날이라 아농낫, 동바이, 마랑 그리고 다른 태국 친구들과 이태원 클럽으로 갔다.     

클럽 앞에 도착하니 번쩍거리는 조명과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이 주변 공기를 압도했다. 섹시하고 멋진 옷으로 차려입은 남녀들이 줄을 서 있었고 나는 설레고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클럽 안은 신세계였다. 반짝이 조명이 사방으로 쏘아서 흩어지고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는 귀를 때리고 사방에서는 멋진 남녀들이 가볍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배가 드러나 보이는 크롭 티를 입고 짧은 치마를 걸친 동바이는 너무나 익숙하게 리듬을 탔는데 나와 마랑은 좀 어색하게 흔들며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다.   

   

그런데 일행인 수타가 갑자기 원숭이 흉내를 내며 막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때다!’하고 다른 친구들도 원숭이 춤을 따라 해 갑자기 원숭이춤 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동바이는 모른 척 다른 쪽으로 옮겨 갔지만 나는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웃으며 손뼉을 쳤다. 옆에서 아농낫도 함께 몸을 흔들다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와 아농낫은 잠시 클럽 바깥 골목으로 나왔다. 골목에서는 여러 명이 나와 담배를 피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기침이 좀 났다.      


“너무 시끄럽네. 좀 창피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우리 둘만 어디 조용한 데로 갑시다!”     


“뭐가요?”     


“왜 꼭 저렇게 원숭이 춤을 춰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하는지...”     


“어때서요? 함께 어울려 노는 게 좋잖아요.”  

   

내가 대답하자 아농낫이 잠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우리 따로 나가요!”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난 원숭이 춤 좋기만 하던데. 우리 같이 더 놀아요.”     


나는 기침이 계속 나는게 싫기도 하고 친구들과 더 놀고 싶어서 안으로 들어 왔다. 그런데 들어오다가 석훈을 본 것 같다. 2층 난간에서였다. 하얗고 반듯한 이마가 훅 눈에 들어 왔다. 그도 나를 본 것 같다.             


* 사진은 모두 스마트 물류 시스템 제조사 홍보 영상에서 캡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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