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수타가 나를 보고 잡아끌어서 다시 춤추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도 조금 익숙해져 몸을 움직이는데 뒤에서 뜨거운 남자 몸이 붙는 거 같더니 목 뒤로 훅 뜨거운 입김이 들어왔다.
“야! 정말 이쁜데... 한국 여자랑은 느낌이 달라”
지렁이가 몸에 붙는 듯했다. 확 기분이 나빠져 몸을 떼는데 한국 남자가 따라와 바로 뒤에 붙었다. 할 수 없이 고개 돌려 말했다.
“뭐 하세요?”
그때 한국 남자가 귀 뒤에 뜨거운 김을 훅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동남아 년이 이쁜데. 밖으로 나가자! 내가 잘해 줄게.”
남자가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안으며 목 뒤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징그러웠다. 거세게 팔을 떼어내며 돌아서 소리쳤다.
“변태!”
그리곤 남자를 확 밀었다. 남자기 밀리며 춤추던 주변 사람들이 ‘으악!’ 소리 지르며 흩어졌고 남자는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졌다. 나는 10킬로 쌀포대를 10개를 쓱쓱 옮기는 괴력의 소유자다.
바닥에 넘어진 한국 남자가 화난 얼굴이 되어 일어나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대로 발로 남자의 사타구니를 차 줬다. ‘퍽!’ 다시 남자가 ‘윽!’ 소리를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때 옆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뭐야?’ ‘동남아 년이 쳤어?’
한국 남자들이 세 명쯤 더 달려드는데 손에 맥주병을 들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리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사고를 일으키면 안 된다. 멈추어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그때 옆에서 춤추던 동바이가 나섰다.
“뭐 하니? 내 친구 잘못한 거 없어!”
마랑도 겁 없이 소리 질렀다.
“그래! 남자들이 왜 못 살게 굴어!”
뒤에서는 태국 친구들이 한국 남자들을 무섭게 노려보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걸 보고 한국 남자들이 빈정거렸다.
“동남아 애들이 이런 데 왜 와? 주제도 모르고.”
“남의 일자리나 빼앗고. 너네 나라로 못 돌아가!!”
순간 태국 친구들이 주먹 쥔 손을 높이며 달려 들렸는데 내가 두 팔을 올려 막았다.
“ไม่ได้นะ! ถ้าตีพวกเรา พวกเราจะถูกเนรเทศ! (안 돼! 때리면 우리 추방돼!)”
할 수 없었다. 그대로 털썩 바닥으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이마에 대고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렸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그러자 한국 남자들이 피식 웃더니 손에 있던 맥주병을 들어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줄줄! 맥주물이 흘러내려 머리카락을 적시고 얼굴에 흘러 눈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비참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아끌어올리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빨리 일어나지 못해요!!”
익숙한 목소리. 올려다보니 석훈이었다. 한국 남자들이 석훈 앞으로 나와 코를 벌름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 새끼 뭐야?”
“왜 재밌는 구경을 방해해!! 비키지 못해!!”
“뭐 재밌는 구경???”
석훈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한국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순간 퍽! 한국 남자가 휘청했다. ‘이 새끼가!’하고 다른 친구들이 석훈에게 달려드는데 석훈이 슬쩍 몸을 비켰다. 남자들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순간 석훈이 옆차기를 날려 남자를 꺼꾸러 뜨렸다.
다른 한국 남자 친구들이 달려드는 걸 태국 친구들이 몸으로 막아 주고 있었다. 다만 아농낫은 보이지 않았다.
“와! 이 새끼들! 단체로 붙자 이거지! 좋아! 경찰 부르자!”
“경찰 불러! 폭력을 쓴 건 니들이야!!!”
그러자 석훈이 나섰다.
“여자 성추행한 건 너야!”
태국 친구들이 ‘맞다! 맞아!’ 호응하자 한국 남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니들 불법 체류자 아냐? 경찰 앞에서 따져 보자고!!”
순간, 공중에서 지폐 다발이 날려 흩어졌다. 사람들이 다들 행동을 멈추고 날리는 지폐를 보더니 잡느라 난리가 났다. 물론 시비를 건 남자들도 지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지폐가 내리는 비처럼 떨어졌다.
“됐지? 합의금으로 충분할 거다.”
석훈이 바닥에서 돈을 집느라고 정신이 없는 한국 남자들에게 소리쳤다. 이럴 수가! 태국 친구들은 박수를 쳤다. 나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석훈은 내 앞에 와 섰다.
“다 젖었잖아.”
석훈이 내 팔을 잡더니 출입문 쪽으로 끌고 나갔다. 사람들이 길을 터줬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그대로 그의 손에 끌려 나갔다.
클럽 바깥 골목길에서 그와 마주 섰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됐고 왜 그가 여기 있는지, 무슨 말을 그에게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가 먼저 야단을 쳤다.
“이게 뭡니까? 왜 이런 꼴을 당해요!!”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러 생각들이 오갔는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그런데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 왜 구해줬어요?”
석훈이 멈칫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이상하잖아요. 석훈은 이런 사람 아닌데...”
석훈은 입을 열지 않고 지그시 나를 봤다. 안타깝다는 눈이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지혜가 나타났다. 그녀가 다가왔다.
“일행이 기다리세요!”
그제야 석훈은 정신이 든 듯 얼른 돌아섰다. 아무 말없이 석훈과 지혜는 클럽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완전히 들어가기 전 지혜가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슨 일인지 다 이해가 되기도 전에 문으로 태국 친구들이 몰려나왔다.
‘괜찮아?’ ‘춥진 않아?’ ‘석훈 쫌 멋있더라!’ 등등 떠들며 휴지로 젖은 내 머리와 얼굴과 옷을 닦아 주었다. 보이지 않던 아농낫은 난감한 얼굴로 뒤에 서 있었다.
맥주에 젖은 머리와 얼굴은 닦아냈지만 내 마음을 적신 비참함은 닦이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아농낫의 차 안에서 나는 클럽 안의 일과 석훈의 등장과 그리고 그의 행동을 계속 머리에 빙빙 돌았다. 그리고 ‘남의 일자리나 빼앗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 한국 남자들이 한 말이 내 마음을 깊게 베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우릴 그렇게 생각하나 봐요.”
젖은 목소리로 옆에서 운전하는 아농낫에게 말하자 그는 나를 힐끗 보았다.
“우리나라가 못 살아서. 한국 사람들이 그러는 거 어느 정도 당연해요.”
아농낫이 차 앞 도로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깊이 씁쓸한 기분은 어쩌지 못하겠다. 뒤에서 동바이와 마랑이 태국어로 속닥이는 소리만이 조그만 위로가 돼 주었다.
사고가 난 후 바로 클럽을 나왔다. 계속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외국인 투자자의 얼굴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긴 뭐 클럽에 오래 있었고 볼 거 다 봤으니까.
달리는 지혜의 차 안에서 밤거리를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동남아 여자가 한국에 와서 힘든 일도 하고 추행도 당해 마음이 아렸다. 착하고 당당한 여잔데 그런 꼴을 당하다니. 내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한국에 와서 고생을 자초했다는 원망이 들었다. 한편으론 내가 너무 나섰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좀 이상한 그림이었지 않은가.
“주먹 쓰시는 건 또 언제 배우시고.”
운전하면서 지혜가 물었다.
“저 운동합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서.”
“왜 동남아 여자 일에 휘말리고 그러세요. 외국인 투자자 앞에서.”
비겁한 말에 약간 발끈했다.
“우리 회사 사원이잖아요. 모른 척할 수 있나?”
“외국인 사원 안 좋아하시잖아요. 혹시 람야이 좋아하세요?”
지혜가 갑자기 훅 묻자 그 말이 내 가슴을 한방 쳤다. 아마도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다. 표정을 들킬까 봐 고개를 돌렸다.
다음날 근무에서 석훈이 아침 브리핑하는 걸 보며 나는 ‘왜 석훈이 나를 구해 줬을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솟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미리 찢어 둔 박스 조각을 손에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컴퓨터 앞에 선 그에게 살금 다가가 박스 조각을 그의 턱 밑에 댔다. 마치 턱에 수염이 난 것처럼.
“이러니까 분명히 본 얼굴인데.”
그가 휙 돌아보더니 화를 냈다.
“뭐 하는 겁니까?”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수염쟁이 한국 남자죠? 파타야 온 적 있죠?”
그러나 그가 정색을 했다.
“이런 장난은 안 돼요. 지금 근무 시간이에요. 근무 점수 깎을까요?”
무섭게 그가 화를 내서 겁을 먹었다. 할 수 없다. 돌아서 나오는데 갑자기 그가 불렀다.
“람야이님!”
드디어 인정을 하려나 보다. 얼굴이 환해져 돌아 섰다.
“네!”
“6층 가세요!”
바로 업무 얘기. 그러면 그렇지. 그러나 6층 가는 건 좋다.
“나만 6층 가요?”
“네.”
“동바이랑 마랑이랑 같이 갈게요.”
“알고리즘상 1명만 필요합니다.”
“그놈의 알고리즘! 내가 일을 잘하나 봐요.”
놀리듯 말해주고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를 들고 돌아섰다.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날이다. 6층에서는 PDA가 자꾸만 비교적 가볍고 값비싼 액세서리를 집품하라고 지시했다. 비싼 액세서리가 가득한 이 구역은 오가는 다른 노동자들도 없이 조용했다. 텀블러는 카트 손잡이에 놓고 카트를 끌며 물건을 찾아 집품 상자에 담았다.
PDA 화면에 진주 귀걸이를 담으라는 지시가 떴다. 선반에서 찾은 진주 귀걸이는 크고 하앴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다.
“예쁘다!”
귀걸이 포장지 바코드를 찍어 집품 상자에 넣고 돌아서는데 앞에 화장실이 있었다. 볼 일을 보고 돌아오니 텀블러의 위치가 살짝 돌려 있었던 것 같다.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이 너무 길었을까 봐 바로 PDA를 들여다봤다.
운이 너무 좋게도 퇴근 시간까지 6층에서 일을 했다. 마지막 집품 박스를 레일에 올리니 ‘업무 종료’ 버튼이 떴다. 일을 정리하고 출입구로 나섰다.
출입 검색대 앞에는 퇴근하는 노동자들로 줄이 길었다. 다들 빨리 나가고 싶어 급한 얼굴들이었다. 나도 텀블러를 손에 들고 줄 끝에서 이동했다. 오늘따라 지혜가 검색대 검색 요원 옆에 서 있었다. 줄을 따라 이동하는데 그녀가 검색 요원과 얘기하는 게 들렸다.
“이사님이 웬 일로 나오시고.”
“퇴근 보안 점검 좀 하려고요.”
지혜는 웃는 것도 참 세련되었다.
퇴근할 때 검색대에서는 노동자들이 창고의 물건을 하나라도 훔쳐 나갈까 봐 검색 요원이 꼼꼼하게 체크한다. 다만 노동자들이 물 마시라고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만 허용한다. 검색 요원 앞에 도착해 텀블러를 요원에게 넘겨주고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갑자기 지혜가 외쳤다. ‘잠깐만!’
“가드님! 이거 검사 안 하시네요.”
그녀가 내 텀블러를 가리키고 있었다.
“투명하지 않은 물건은 원래 통과 못하는 거잖아요. 규정 위반이에요.”
내 텀블러는 철 텀블러라 투명하지 않다. 검색 요원이 당황했다.
“그게... 이거 사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관례상 일일이 검사 안 하는데... 더워서 시원한 물 마시라고.”
“규정은 지켜야죠.”
내가 무슨 일인지 쳐다보는 사이 보안요원이 내 텀블러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보안 요원의 눈이 커졌다.
“이거 뭐야! 귀걸이잖아!”
뭐라고! 나도 얼른 텀블러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집품했었던 같은 하얗고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안에 들어 있었다.
*소설 '람야이'는 전체 60화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계속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