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운 Nov 03. 2024

22화. 이국적이잖아!

지혜가 급하게 속삭였다. 나도 알지만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시스템을 알지 못할 것이다.     


뒤에서 람야이가 ‘석훈!’하고 불러 돌아봤는데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가 내게 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농낫이 나타나 람야이를 잡았다. 아농낫은 흥분한 얼굴로 람야이의 손을 잡고 얘기했다.  

    

“โอเคมั้ยครับ? (괜찮아요?)”     


아농낫이 태국어로 말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람야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소리쳤다.      


“석훈! 고마워!”     


아는 체하면 안 된다. 못 들은 척 돌아섰다. 뒤에서는 태국어가 계속 들렸다.      


“เหนื่อยใช่มั้ยครับ? ผมโดนเรื่องที่รู้สึกไม่ยุติธรรมมา. ไม่เจ็บป่วยตรงไหนหรอครับ? (힘들었죠? 괜히 억울한 일 당해 가지고. 어디 아픈 덴 없어요?)”     


람야이가 태국어로 뭐라고 얘기한 것 같다. 아마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괜찮다고 얘기했겠지. 그게 그 여자니까.      


동바이      

지석과 사귄 지 100일이 되었다. 센터 집품장에 서 처음 봤을 때 그가 먼저 전화번호를 물어 왔다. 당연하지. 나는 힙한 공 주니까. 두 번째 만난 날, 우리는 키스를 했다.     


이후 매번 만날 때마다 꼭 모텔에 갔다. 내 벗은 몸이 초콜릿 같다나. 섹스를 끝낸 후 그가 침대에 벌렁 누운 채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그냥 헤어지자. 바로 대학 친구 모임 가야거든.”     


나를 두고 그냥 간다고? 한국 남자들은 여자 친구를 자기 친구들한테 소개한다고 하던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누워 있는 그를 돌아보고 물었다.    

 

“언제 나를 여자 친구로 소개할 거야?”     


지석이 약간 당황했다.      


“내가 태국 사람이라 꺼려져?”     


몸을 기울여 그의 얼굴에 대고 묻자 그가 일어나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럼 나도 가자!”     


지석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 더니 선선해 좋다고 했다. 그게 좋아서 그의 빰에 마구 뽀뽀해 주고는 샤워를 하고 새로 화장을 했다.      


모텔을 나와 서울 강남에 있는 세련된 카페로 갔다. 몇 명의 친구들이 이미 와 있었는데 나를 보자 눈이 커졌다. 그러나 지석은 시원하게 떠벌였다.      


“여기는 동바이. 태국 방콕에서 왔어. 너네 태국 왕족 있는 거 알지? 동바이는 태국 왕조 친척뻘 공주야.”    

 

친구들이 ‘와 대박!’ ‘로열 계급이야!?’ 하며 요란해졌고 나는 우아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는 뭐 하세요?”   

  

친구 하나가 묻자 지석이 나서서 대답했다.    

  

“한국대 대학원에서 공부하잖아. 한국에 유학 온 거지” 

    

잠시 당황했지만 그의 마음을 알겠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해 주었다.      


“야 너 출세했다? 공주랑 사귀어?”      


친구가 물으며 크게 웃자 지석도 함께 크게 웃어 주었다. 하긴 나도 진짜 한국에 유학 오고 싶었다. 사정이 이렇지 않았다면 유학을 왔을 거다.   

   

친구들은 서로 근황을 물으며 시끌벅적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나도 우아한 공주 행세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지석의 얼굴을 생각해 말은 안 하고 주로 웃었다. 그런데 늦게 여자 하나가 도착했다. 한국식 세련됨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여자가 다가와 ‘잘들 있었어?’하고 말을 붙이자 다들 돌아보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지석의 눈이 가장 커지며 벌떡 일어서는 것을.     


“너, 너, 언제 한국 왔어?”     


말까지 더듬었다.      


“한 달 전에. 다들 잘 지냈어?”     


한국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와 너 미국물 먹더니 예뻐졌다’ ‘성형했냐?’ 등등 요란스럽게 웅성거렸다. 한국 여자의 블라우스는 세련되게 하늘거렸고 한국말은 사근사근했다.     


“What a plastic surgery! I was so busy to study in college. (성형은 무슨.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바빴는데.)”     


그녀가 영어로 대답했다. 그때 놀란 얼굴로 서 있던 지석이 물었다.      


“한국엔 완전히 돌아왔어?”     


“응. 앉아.”     


그 말에 지석이 순한 양처럼 자리에 앉았다.


“한국에서 뭐 하는데?”     


“I got a job. A US based consulting company in Seoul. Everyone knows it in the industry. (회사 잡았어. 미국 컨설팅 회사. 업계에서는 다 아는 데야.)”


“뭐라고?”     


지석이 묻자 한국 여자가 대답했다.     


“미국 컨설팅 회사라고. 너는 여전하구나.”     


지석이 멋쩍게, 그러나 뚫어지게 여자를 쳐다보는 걸 나는 보았다. 틀림없이 특별한 관계였다. 친구들이 이런저런 얘기로 한참을 떠드는데 한국 여자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나갔다. 그러나 지석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따라갔다. 나도 슬며시 지석을 따라갔다. 다들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 여자가 화장실에 나오다 문 앞에 서 있는 지석을 보더니 흠칫했다. 그러나 지석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나는 통로 벽 뒤에 숨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날 걷어찬 건 너야.”     


“그야 네가 미국 간다고 하니까.”     


“다시 사귀자는 거야?”     


여자가 묻자 지석이 여자를 벽 쪽으로 밀며 느끼하게 말했다.      

 

“보고 싶었다니까.”     


“그럼 저 동남아 여자는 뭔데?”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뭐라고 할까? 피가 다 귀에 몰리는 것 같았다.    

 

“그거야 뭐 좀 데리고 노는 여자. 이국적이잖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손으로 벽을 꼭 짚고 몸을 벽 뒤로 더 숨겼다. 지석이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조용히 돌아 나오는데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마랑     

지난번 안산 변두리 공장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숫차이 오빠가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는 얘기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쉬는 날인 오늘은 큰 마음을 먹고 안산 오빠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왔다. 용기가 안나 람야이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오늘 아농낫과 데이트를 나갔다.     


숫차이 오빠가 살고 있다는 동네는 안산 시장 뒤쪽 허름한 빌라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풀포기 하나 나 있지 않고 빼곡하게 맞붙은 빌라마다 주소를 확인해 맞는 주소를 찾아냈다. 반지하 주소였다.     

 

3층짜리 빌라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몸집이 좋은 태국 남자가 나타나더니 누구냐고 물었다. 숫차이 오빠를 찾아왔다고 대답하자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대문을 열고 지하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우락부락한 남자가 몸에 비해 작아 보이는 철문을 끼익 열자 작은 부엌이 보였다. 허름한 부엌에는 온갖 빈 술병들과 먹다 만 배달 음식 그릇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냄새가 지독했다. 얼굴을 찌푸리고 코는 막는데 나를 안내해 간 남자가 안쪽 방문에 대고 숫차이를 불렀다.     


조금 있다가 삐익 방문이 열리더니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 나왔다. 지독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연기 사이로 오빠의 얼굴이 나타났다. 살이 좀 찐 것 같았는데 너무 반가웠다.      


“พี่คะ! (오빠!)”     


내가 부르자 숫차이 오빠가 눈을 모으고 나를 한동안 바라보는 것 같더니 알아봤다.     


“เธอเป็นมารังหรอ? (너 혹시 마랑이니?)”     


“ค่ะ. ฉันมารังค่ะ. (네. 저 마랑이에요.)”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날 뻔했다. 숫차이 오빠는 좀 민망해하는 얼굴이더니 문을 열고 나왔다. 안쪽에서는 ‘ผู้หญิงหรอ? (여자야?)’ 하는 여러 태국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방 문을 열고 나와 담벼락 사이 좁은 통로에 마주 보는데 오빠의 몸은 한 눈에서 훨씬 커졌다. 굵은 목 뒤에는 용문신이 꿈틀거리고 반팔 밑으로 드러난 굵은 팔에도 용꼬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향에서 본 오빠의 착한 눈매만 보여 너무 감격스러웠다. 오빠 때문에 한국까지 왔는데.     


“แต่ก่อนจะถึง ฉันและแดน? (네가 여긴 웬일이니?)”     


“พี่คะ! รู้มั้ยคะว่าฉันหาเจอเท่าไหร่? (오빠!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เธอตามหาฉันทำไม? (네가 나를 왜 찾아?)”     


이런 말은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조그마하게 소리가 배어 나왔다.      


“เพราะว่าคิดถึงพี่น่ะ. (오빠가 보고 싶어서.)”     


“ทำไมถึงคิดถึงฉันล่ะ? (왜 내가 보고 싶은대?)”     


갑자기 가슴속에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어 어지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อย่ามาที่แบบนี้. ฉันไม่รู้สึกยินดีกับนายเลยซักนิด. (이런 데 오지 마라. 나 너 하나도 안 반갑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리는데 숫차이 오빠가 불렀다.      


“เธอมาทำงานใช่มั้ย? ทำงานที่ไหน? (너 일하러 왔지? 어디에서 일하니?)”     


오빠가 물어주는 게 반가웠다. 얼른 돌아서 대답했다.    

 

“ซอวอนมาร์เก็ตครับ (서원 마켓요.)”     


“오! 서원 마켓?? ออนไลน์ช็อปปิ้งชื่อดัง? (유명한 온라인 쇼핑?)”
 

오빠의 얼굴이 환해졌다.   

   

“ค่ะ. (네.)”     


“งั้นหรอ? พวกเรามาเจอกันบ่อยๆเถอะ แน่นอนว่าคนบ้านเกิดก็ต้องเจอกันบ่อยๆสิ (그래? 우리 자주 보자. 고향 사람들이 당연히 자주 봐야지.) ”     


마음속에 환한 빛이 켜졌다.      


람야이

아농낫은 요즘 적극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쉬는 날 아농낫은 고급 한국 문화로 데려다주겠다고 나가자고 했다. 그의 멋진 차를 타고 간 곳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고급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넓은 레스토랑에는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해서 주눅이 들었지만 아농낫은 당당하게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내려다보여 나는 황홀해졌다. 테이블에 놓인 접시와 와인 글라스도 반짝거리며 고급스러웠다. 이래도 될까? 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ต้องแพงมากแน่ๆเลย จะโอเคหรอครับ? (너무 비싸겠다. 괜찮겠어요?)”     


“하하. ฉันมีเงินเยอะค่ะ. (나 돈 많아요.)”     


아농낫이 시원하게 웃었다. 곧 비싼 서양 요리가 차려졌고 나는 방콕 샹그릴라 호텔 꼭대기 레스토랑 생각이 났다. 여기 와인 글라스는 그때 것과 똑같이 반짝거렸다. 그때 수염쟁이 한국 남자와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주며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말했었는데. 그런데 나는 포도 주스인 줄 알고 마구 마셨었는데.    

 

수염쟁이 한국 남자는 지금 석훈과 이마 모양과 말소리가 너무 비슷하다. 석훈이 아니라고 부정하니 어쩔 수 없지만.      


“เก่งนะครับเนี่ย. (잘하네요.)”     


내가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사용하자 아농낫이 말했다. 그때 경험으로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도 좀 안다.      

“อ๋อ. ค่ะ. (아. 네.)”     


“ชาวชนบทของไทยมักจะเอะอะโวยวายเมื่อมาที่แบบนี้. (태국 시골 출신들은 이런 데 오면 요란한데) 하하.”     

“ฉันก็ไม่ชินกับมันเหมือนกัน. (나도 익숙하진 않아요.)”     


“งั้นหรอคะ? ฉันก็ไม่ชินค่ะ เพราะไม่มีคนรับใช้. (그래요? 나도 익숙하진 않아요. 하인이 없어서.)”     


“เธอ? (네?)”     


“เพราะที่บ้านมีคนรับใช้รับใช้ค่ะ. เวลากินข้าวต้องยืนข้าง ๆ แล้วเสิร์ฟ... พอมาเกาหลีแล้วไม่มีอะไรแบบนั้น ก็เลยลำบากนิดหน่อยครับ. (집에서는 하인이 시중을 들거든요. 밥 먹을 때 꼭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데... 한국에 오니 그런 게 없어서 좀 불편해요.)”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