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부잣집 하녀로 거의 20년을 일하며 나와 동생들을 키웠다. 부잣집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허리가 아프다고 자주 방에 드러누웠었다.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하느라 허리가 유독 아팠고 물일을 많이 해 손에서는 습진이 떠나지 않았다. 물건이 훔쳤다고 물어내라고 해서 월급을 다 바치기도 했고 주인에게 맞아 팔에 멍이 생겨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농낫 같은 주인을 모시느라 그랬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아농낫이 물었다.
“พอฉันบอกว่าวันนี้จะไปเดทกับ Lam Yai คุณแม่ก็บอกว่าให้ลองหาดูว่า Lam Yai เป็นครอบครัวแบบไหนก่อนค่ะ. พ่อแม่รามใหญ่ทำอะไรครับ? (오늘 내가 람야이하고 데이트한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람야이가 어떤 집안인지 먼저 알아보라고 해요. 람야이 부모님은 뭐 하셨어요?)”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농낫의 어머니가 나를 알게 된다면 나를 좋아하실까? 우리 엄마가 부잣집 하녀로 20년을 일했다는 걸 안다면 나를 무시하시진 않을까? 아농낫에게 우리 엄마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얘기도 못 하고 있는데 우리가 과연 계속 사귈 수 있을까? 갑자기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이 불편해졌다.
기숙사로 돌아오니 동바이가 데이트 나갈 때 입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고개를 돌리는 데 얼굴에 마스카라 자국이 얼룩져 판다 얼굴이 되어 있었다.
“지석은 개새끼!”
동바이는 펑펑 울며 소리 질렀다. 옆에 있던 마랑과 함께 휴지를 들고 동바이 얼굴을 닦아 주었다.
“หน้านายดำแล้ว! เหมือนแพนด้าเลย! (너 얼굴이 검어졌어! 판다 같아!)”
“มาสคาร่าเลอะหน้าหมดแล้ว หยุดร้องไห้ได้แล้ว! (마스카라 얼굴에 다 번졌다! 그만 울어!)”
휴지에 검댕이가 잔뜩 묻어 나왔다.
“จีฮุนเป็นคนเลวจริงๆ! (지석은 아주 나쁜 놈이다!)”
마랑이 맞장구치자 내가 한 술 더 떴다.
“ช่าย! เป็นคนที่ต้องถือกระสอบข้าวสาร 10 กิโลทั้งวันเลยนะ! (그래! 하루 종일 10킬로 쌀포대 들어야 할 놈이네!”
동바이는 더 크게 소리 질렀다.
“เล่นกับผู้หญิงไทย! เชื่อผู้ชายเกาหลีไม่ได้เด็ดขาด! (태국 여자를 가지고 놀아! 한국 남자는 절대 믿으면 안 돼!)”
“ต้องไปเจอผู้ชายไทยสิ! (태국 남자를 만나야지!) ”
마랑이 확신에 차서 거들었다. 나도 동의는 한다.
“ใช่แล้ว! (맞아!)”
맞장구쳤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핸드폰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오늘 주간 업무 지시였다. 그런데 그걸 본 우리의 눈이 커졌다. 작업장 장소가 바뀌었다. ‘집품장’이 아니라 ‘포장장’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니 언제나 그렇듯 쌍둥이 건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통로는 노동자들로 가득해 부산했다. 우리는 사물함 구역으로 가며 호기심에 재잘거렸다. 마랑이 가장 흥분한 것 같다.
“อะไรเนี่ย! อะไรเนี่ย! ตู้เสื้อผ้า! ตู้เก็บของหน้าตาเป็นอย่างไร? (뭐야! 뭐야! 포장장! 포장장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는 다른 층에 있는 포장장에 가 본 적이 없다. 나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คงจะเหนื่อยน้อยกว่าการหาของใช้ในบ้านใช่มั้ย? เพราะว่าต้องยืนห่อของในที่เดียว (집품하는 거보다 덜 힘들겠지? 한 자리에 서서 물건 포장하는 거니까.)”
내 말을 들은 동바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ถ้าอย่างนั้น. นี่เป็นสิ่งที่พวกเราได้รับการเลื่อนตำแหน่ง. พวกเราทำงานดีก็เลยได้เลื่อนตำแหน่ง. (그럼. 이건 우리가 승진한 거라고. 우리가 일을 잘해서 승진한 거야.)”
나는 석훈이 궁금해졌다.
“ซอกฮุนย้ายไปด้วยดีมั้ย? (그런데 석훈도 함께 옮길까?)”
“ไม่. ไม่มาหรอก. ลางสังหรณ์ฉันเป็นแบบนั้นเลย. (아니. 안 올 거야. 내 예감이 딱 그래.)”
조심스럽게 묻자 동바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ซอกฮุนที่เหมือนงูไม่มาดีกว่า. แล้วก็มาบ่นบอกให้รีบๆทำทุกวันเลย. (뱀 같은 석훈은 안 오는 게 나아. 맨날 빨리 하라고 야단이나 치고.)”
마랑까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좀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오기를 기대하는 걸까? 감정을 숨기기 위해 사물함으로 뛰어갔다.
포장장은 신세계였다. 다른 노동자들과 줄지어 3층에 있는 포장장으로 들어가자 먼저 넓디넓은 공간에 운반 레일들이 뱀처럼 구역을 나누어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게 보였다. 집품장에 서는 창고 가장자리로만 레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운반 레일이 전 지역을 관통하며 구불거리고 있었고 레일 옆으로는 지네 다리처럼 포장 작업을 하는 작업대가 뻗어 있었다.
각각의 작업대에는 컴퓨터와 바코드 스캐너가 있고 그 위 선반에는 각종 크기의 포장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작업대 옆 통로에는 물건들이 잡품 박스에 담겨 카트로 이동하고 있었고 색깔이 다른 레일로도 집품 박스들이 들어왔다. 레일 돌아가는 소리가 심하게 나 서로 큰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커져 이리저리 둘러봤다. 아까 오기 전 출근 체크 때 A3 구역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장에서는 각각 구역 번호가 쓰인 간판이 내려져 있었고 우리는 그 가운데 ‘A3’ 라인을 찾았다.
“โซน A3 ตรงนั้น. (A3 구역 저기다.)”
가운데 구역에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찾아갔다. 라인 시작하는 지점에 관리자 데스크가 있었고 매니저가 서 있었다. 노동자들이 하나둘 와서 그 앞에 줄을 섰다. 놀랍게도 이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집품장에 서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섞었었는데 이곳에서는 외국인끼리만 일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같은 동남아 출신도 있고 아프리카인, 중국인, 동유럽 출신 등 약 40명이 모여들었다. 서로 얼굴을 보며 웅성웅성거렸다. 거의 모이자 매니저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회사 정책이 바뀌어서 외국인들끼리 한 팀을 이루기로 했어요. 오늘 포장 처음하시는 분들도 있죠? 손들어 보세요.”
우리가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미 여기서 일한 사람들인가 보다. 매니저가 우리에게 말했다.
“자리에 가 계시면 포장하는 법 가르쳐 드릴게요.”
운반 레일 옆에 붙어 있는 작업대 앞에 서자 처음 보는 장치에 긴장이 되었다. 작업대 위에는 바코드를 찍는 스캐너가 있었고 각종 포장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관리자가 옆에 서서 스캐너를 잡고 옆에 놓인 집품 박스 안에서 상품을 꺼내 바코드를 찍으며 알려 주었다.
“빨리빨리 하셔야 해요. 그다음에 컴퓨터 화면에 추천하는 포장지가 나와요. 보고 선반 위에 있는 포장지를 꺼내 포장하셔야 해요”
컴퓨터 화면을 보자 한글이 여러 개 나와 어디에 포장지 추천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포장지인대요?”
내가 묻자 관리자가 대번 얼굴을 찌푸렸다. 컴퓨터 화면 한쪽을 가리키더니 짜증을 부렸다.
“여기 나와 있잖아요.”
그곳에는 “B11”이라고 적혀 있었다. 화면 안에는 한글과 영어가 섞여 나와 있었다. 아직 한글 읽는 것도 익숙지 않은데 영어까지 읽는 건 힘들었다.
“영어로 돼 있어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갑자기 화를 냈다.
“알아서 하세요. 바빠 죽겠는데 일일이 어떻게 가르쳐요. 테이핑 하고 송장 붙이고 스캔하고 운반 레일에 올리세요.”
관리자는 빠르게 말하고 돌아서 나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한국말도 빠르게 말하면 알아듣기도 힘든데 테이핑이 뭐고 송장이 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난감해졌다.
겨우 뒷자리에 있던 아프리카 남자한테 물어 포장하는 법을 배웠다. 진짜 여기서는 같은 노동자에게 뭘 물어서 배워야 한다. 관리자는 화만 낸다. 선반 위에서 적당한 박스 지를 골라 박스를 만들고 상품을 넣고 뚜껑을 닫은 후 테이프 커터기로 테이프를 붙였다. 어렵지는 않았지만 처음 하는 작업이라 빠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포장한 박스를 운반 레일 위에 올린 후 통로 쪽으로 돌아서자 작업대 옆으로는 상품이 담긴 집품 박스가 높이 쌓여 여러 줄 놓여 있다. ‘헉’ 숨이 막혔다.
다시 집품 박스에서 상품을 꺼내 스캔을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을 보자 ‘실패!’ 메시지가 떠 있다. 눈이 커져서 다시 한번 상품을 스캔하자 ‘실패!’ 메시지가 또 뜬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어떻게 된 건지 화면을 들여다보자 전 제품이 아직 출고 전 상태로 남아 있다. 스캐너로 다시 여러 번 상품 바코드를 찍었지만 화면이 넘어가질 않아 다음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에게 묻기는 싫었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는 데스크에서 핸드폰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니저들은 이곳에 핸드폰을 들고 들어올 수 있다. 내가 ‘저기~’하고 묻자 당황해서 얼른 관리자 조끼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화면이 넘어가지 않아요.”
“네?”
“화면이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이미 레일에 올린 상품이 아직 화면에 떠 있어요.”
“개 짜증 나!”
매니저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내 마음이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