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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Oct 20. 2024

17화. 남의 나라에 왜 옵니까?

지혜 이사에게 당당하게 말은 했지만 아농낫의 병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가슴이 떨렸다. ‘괜히 너무 나선 게 아닌가?’ 겁이 났다. 이러다가 계약 못 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병실에 돌아와 아픈 얼굴로 자고 있는 아농낫의 얼굴을 보자 마음을 단단히 하기로 했다. 내가 뱉은 말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석훈

쌀포대를 쌓는 일이 그렇게 섹시한 일이었던가? 자꾸 람야이와 몸이 부딪히는 데 또 그걸 느끼는 나는 뭐라 말인가? 마감 치느라 바빠 죽겠는데.      


원숭이 무리를 물리치고 핸드폰을 찾아 준 여자. 무거운 내 배낭을 메고 태국 방콕까지 쫓아와 돌려준 여자. 와인을 포도 주스로 알고 벌컥벌컥 마시곤 내 품 안에 쓰러진 여자. 그리곤 자기를 어떻게 했다고 귀엽게 펄쩍펄쩍 뛰던 여자. 한국으로 돈 벌러 오겠다고 다짐하던 강한 여자. 게다가 내 눈빛이 그날 밤 눈빛이었다고?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다. 매일매일 스티브 새끼한테 감시당하고 있는 형편인데... 다시 모니터에 흘러내리는 알고리즘으로 눈길을 돌리는 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지혜가 들어왔다.      


본사 건물은 강남에 있지만 집품장 관리자 일을 시작한 후에는 경기도 구석에 있는 물류 센터 꼭대기에 있는 사무실에서 혼자 IT 작업을 한다. 본사 인사부에 있는 지혜는 이곳 인사부를 본다며 자주 찾아오고 있다. 1층 집품장에 서 사고가 났다고 보고가 들어오더니 늦은 밤인데도 급하게 찾아온 거다.      


“아무래도 상무님이 관리하던 사원이니까요. 빰을 맞았더라도 그걸 인정할 수는 없어요. 회사 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제기 수 있습니다.”     


“람야이가 인사 위원회를 요청했다고요?”     


“네. 외노자 주제에 그냥 수구리고나 있지.”    

 

외노자! 단어에 약간 비하하는 느낌이 있지만 뭐 사실이니까.


“어떻게 하려고요?”     


“인사 위원회 하면 하죠. 무서울 건 없어요. 능력 부족으로 몰아가는 데 손가락만 까닥하면 되는대요.”     


음... 사원 인사 기록을 조작하는 건 밥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인종 차별 문제라... 문제가 불거지면 회사에게 불리하니까. 아무 말을 않자 지혜가 가겠다며 돌아 섰다. 람야이가 잘릴 것인가?    

 

람야이     

사흘 후 인사 위원회는 바로 열렸다. 비교적 넓은 회의실에 들어가니 지혜가 중간에 앉아 있고 그 옆으로 4 명의 한국인 관리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혜가 앉은자리 앞으로는 ‘인사부 이사’라는 명패가 놓여 있고 다른 위원들 앞에도 ‘출고 총괄 이사’ ‘입고 총괄 이사’ ‘물류 총괄 이사’ 등등 붙어 있었다. 지혜는 그들에게 음료수를 권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다들 친한 것 같았다.      


나는 5 명 앞에 얼굴이 하얘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아 몸이 떨렸다. 태국 친구들한테 들으니 이런 건 해고를 위한 의례 절차나 다름없단다. 더구나 나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외국 노동자 아닌가? 여기서는 편들어 줄 사람이 없다.     


인사 위원 중 하나가 물었다.     


“아농낫은 한국인 관리자에게 빰을 맞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걸 봤습니까?”     


이 질문은 예상했다. 지금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다.     

 

“네, 맞습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끝까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혜가 서둘러 나섰다.  

    

“그건 확실하지 않고요. 오늘 이 자리는 그걸 얘기하는 자리에 아니에요. 1개월 수습 기간이 끝나는 람야이님에 대한 계속 계약 유지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현재 람야이님 근무 기록은 계약 유지할 수 있는 기준선에 모자랍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소리쳤다.     


“근무 기록요?”     


“네. 집품 속도와 PDA 이용 시간 모두 기준에 모자라요.”     


지혜가 차갑게 대답했다. 이럴 수가. 나는 열심히 일했다. 다른 사람보다 결코 못하지는 않았다.     

 

“나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내가 소리쳤지만 지혜는 못 들은 척 위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사님들! 각자 태블릿에서 람야이님의 근무 기록을 확인해 주세요. ”     


하는데 이사 하나가 태블릿 화면에서 고개를 들며 의문을 제기했다.     


“기록이 우수한대요?”     


순간 지혜가 바로 태블릿을 터치해 확인하는데 눈이 커졌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람야이님 인사 기록이 모두 우수 이상으로 나옵니다. 거의 최우수 등급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혜는 아무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들은 ‘수습사원들 중에 기록이 제일 좋은 데 왜 그래?’ 말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열심히 들었다. 마음에서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인재를 놓칠 순 없습니다.”     


이사 하나가 말했다. 지혜는 당황한 얼굴로 ‘기록 착오’라고 말하더니 위원회를 해산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환한 얼굴로 회의실을 뛰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아농낫이 서 있었다. 부목을 댄 다리로 목발을 짚은 채.     

 

“어떻게 됐어요?”    

 

그가 묻자 나는 두 팔을 올리며 소리쳤다.    

  

“야호! 나 엘리트 사원이에요. 만세!”     


내가 환호하자 아농낫을 잘 됐다고 소리치며 박수를 쳤다. 그 뒤로 지혜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통로를 따라 나가는 지혜의 뒷모습을 따라 보는데 통로 끝에 석훈이 지나가는 모습이 얼핏 보인 것 같다. 너무 순식간이라 모르겠다. 아농낫이 쩔뚝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회사에서 허가해 줘 이틀 동안 병원에서 아농낫을 돌봐줬다. 그런 의미에서는 참 좋은 회사이다. 복귀해서 야간 근무를 하며 분유 통을 집품 박스 안에 넣고 있는데 석훈이 들어왔다.  

    

“띄엄띄엄 일할 거예요?”     


그럼 그렇지. 곱게 말하는 법이 없다. 그래도 이 남자에게는 어쩐지 편한 느낌이 든다. 이런 말 물어도 될 것 같았다.     


“한국 관리자는 한국 부하 사원 안 때리죠?”     


“무슨 말이에요?”      


“아농낫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때린 거죠?”     


석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관리자가 때린 적이 없다잖아요.”    

 

이 남자도 결국 한국인 편을 드는 건가? 마음이 쿵 내려앉았지만 다시 한번 물어봤다.     

  

“내 말 태국 사람이라 안 믿는 거죠?”     


석훈이 아무 말을 안 한다.     

  

“나 한국 사람이면 내 말 믿을 거죠?”     


그러자 그가 발끈했다.      


“그러게 남의 나라에 왜 옵니까? 그렇게 억울하면 남의 나라에 왜 오냐고요? 그냥 자기 나라에서 살지.”   

   

순간 울컥했다. 너무 진실인가? 그래도 다른 진심도 있다.     

  

“나도 태국에서 돈 벌 수 있었으면...”     


울먹거리는 소리가 나와서 말을 끊었다. 그러나 끝까지 말하고 싶었다. 침을 꿀꺽 넘기고 말을 이었다.     

 

“... 한국 안 왔어요.”     


그러나 눈 안에 눈물이 고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안타깝게 나를 쳐다본 것 같다.     


아농낫은 나에게 너무 고마워했다. 저녁을 쏘겠다고 나를 불렀다. 벌써 부목을 떼고 퇴원해서 기브스를 한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멋진 태국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갔다.     


진홍색 부켄달리아 꽃이 장식된 고급 식당이었다. 테이블에 앉자 그는 내 앞으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황금빛으로 포장된 박스 안에는 한국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ขอบคุณค่ะ! อันนี้มันแพงมากเลยนะ. (고마워요! 이거 너무 비싼 건데.)”     


내가 당황해서 도로 박스 뚜껑을 닫아 돌려주자 그가 단호하게 얘기했다.     


“อันนี้ไม่ใช่ผม แม่ของผมเป็นคนสั่งครับ. จะทำให้ฉันเป็นลูกอกตัญญูเหรอคะ? (이거 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시킨 거예요. 나를 불효자 만들 거예요?)”     


할 수 없이 선물을 받았다. 맞은편에서 아농낫이 미소 짓는데 역시 방콕 남자스럽게 세련됐다     


“แม่บอกว่าอย่าอยู่ในที่ที่อันตราย ให้รีบกลับมาค่ะ. (엄마가 위험한 데 있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 난리예요.)”     

“ใช่ครับ. ก็แค่กลับไปสิ ทำไมอยู่เกาหลีตลอดเลยล่ะครับ? (맞아요. 그냥 돌아가지 왜 계속 한국 있어요?)”    

 

그가 잠시 머뭇하더니 대답했다.     


“ฉันมีพี่น้อง 5 คนค่ะ. พี่ชายคนโตเรียนอยู่ที่อังกฤษ ส่วนพี่ชายคนเล็กเป็นทหารครับ. พี่สาวเป็นอาจารย์มหาวิทยาลัย ส่วนน้องชายเรียนมหาวิทยาลัยกรุงเทพค่ะ. ยังไม่รู้ว่าคุณพ่อจะลาออกจากบริษัทให้ใครค่ะ. (나한테 형제자매가 다섯 명 있어요. 큰 형은 영국에서 유학 중이고 작은 형은 군인이에요. 누나는 대학 교수고 동생은 방콕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요. 아버지가 누구한테 회사를 물러줄지 아직 모릅니다.)”    

 

아! 그렇구나. 재벌 기업 형제들끼리 서로 경쟁을 하는구나. 그러나 아농낫이 가장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믿음이 갔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태국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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