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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Oct 18. 2024

16화. 태국 사람이라 때렸죠?

그가 내 빰을 때렸다. 아프기도 했지만 모욕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말을 못 하고 빰을 감싸고 그를 노려 보았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 사람 말을 들어야지!”     


매니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 가는데 굴욕감이 온몸을 타고 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람야이의 숨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농낫! ทายถูกมั้ยคะ? (아농낫! 맞았어요?)”     


람야이가 눈이 커져서 보고 있었다. 너무 수치스러워 말도 나오지 않았다.     


“...”     


람야이의 눈에 물기가 어린것 같다.    

  

“โอเคมั้ยครับ? (괜찮아요?)”     


“ฉันเป็นคนยังไง... เขาตีฉัน...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나를 때리고...)”     


입술을 씹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อดทนนิดนึงครับ. จะทำให้คนเกาหลีดูน่าเกลียดไม่ได้นะคะ! (조금 참아요. 한국 사람한테 밉게 보이면 안 돼요!)”     


“ฉันต้องทำงานที่เกาหลีในขณะที่ได้รับการปฏิบัติเช่นนี้หรือคะ?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일해야겠어요?)”     


돌아서 가는 매니저의 뒷모습을 노려 보며 꾹꾹 말을 씹었다. 그리곤 매니저를 잡으러 가는데 람야이가 팔을 잡았다.     


“เดี๋ยวก่อน! ต้องอดทนกับการมาเกาหลีแล้วได้เงินบ้างนะครับ (잠깐만! 이왕 한국에 온 거 좀 참고 돈 벌어야죠.)”      


순간 멈칫했다. 맞는 말이다. 람야이가 까치발을 하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สีเปลี่ยนไปนิดหน่อยแหละ. คนเลวนี่ด่ากันเองให้เต็มที่เลย. ให้ไปเหยียบทางอึ. คิดซะว่าไม่เคยเกิดขึ้นแล้วก็ทำงานค่ะ! (조금 색깔이 변하긴 했다. 나쁜 놈은 우리끼리 실컷 욕해요. 똥길 밟으라고. 그냥 없던 일 치고 일해요!)”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람야이가 나를 지게차 쪽으로 밀었다. 어쩔 수 없이 지게차 운전대에 올랐다. 람야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파이팅!’ 해 주어서 할 수 없이 운전대를 돌렸다. 1번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문이 열려 있었다.  

   

옮겨 온 냉장고 팔렛 밑바닥에 지게차 다리를 넣고 팔렛을 올렸는데 역시나 앞이 안 보였다. 매니저가 올린 박스 하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강 가늠을 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리는데 지게차가 약간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멈추지도 못하고 계속 운전대를 돌렸는데 ‘쿵’ 지진 같은 소리가 나며 지게차가 옆으로 넘어졌다.    

  

운전대에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며 ‘뿌드득’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으악!’ 정신이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아농낫!!”   

  

멀리서 람야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고 보니 병원 입원실이었다. 마취에서 깨서 그런지 왼쪽 다리가 아프다.      


“ตื่นแล้วหรอครับ? (깼어요?)”     


부드러운 람야이의 목소리. 순간 ‘윽!’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왔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람야이 옆으로는 인사부 이사 지혜가 다른 직원과 함께 서 있었다.      


“괜찮습니다.”     


“괜찮겠지. 엄살 피우지 말고.”     


거친 목소리. 출고 담당 매니저가 옆에 서 있었다. 순간 욱 화가 치솟아 일어나 앉으려는데 람야이가 손으로 막았다.     


“당분간 움직이면 안 된대요.”     


도로 누웠지만 람야이가 버튼을 누르자 침대 윗부분이 올라와 상반신을 세울 수 있었다. 지혜가 물었다.   

   

“경위 조사를 할게요. 아농낫님이 냉장고 더미 위에 전자레인지 얹으셨다면서요?”     


뭐라고?? 훅 열이 올랐다.     


“뭐라고요? 내가 한 거 아닙니다. 매니저가 한 거라고요.”     


“씨발! 새끼가! 너 거짓말할래?”     


매니저가 목에 핏대를 세우더니 소리쳤다. 그러자 지혜가 매니저에게 눈짓을 했다.

     

“잠시만요! 자세한 조사는 다시 해 보도록 할게요. 어쨌든 일하다 다친 거니까 산재 처리하고 보상금도 나올 거예요.”     


그러나 이걸로 끝날 일이 아니다. 더 화나는 일은 따로 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매니저가 제 빰을 때렸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빰을 가리키자 매니저가 폭발하듯 앞으로 나섰다.     


“내가 언제?”     


지혜가 나서는 매니저를 팔로 잡으며 제지했다.      


“사실이에요?”     


“안 때렸어요. 절대 안 때렸다고요. 씨발!”     


매니저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번에 나선 건 람야이였다.     

 

“매니저가 때렸어요. 제가 봤어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지혜와 매니저가 람야이를 돌아보는데 매니저가 이번에 람야이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 이놈들이 쌍으로 나를 모함하네. 외노자 주제에. 너네들 태국 것들이잖아. 그래서 편드는 것 아냐?”     


옆 자리에 있는 환자가 돌아보는 것도 상관없이 매니저가 소리를 질렀다. 그때 지혜가 ‘잠시만요!’ 소리치며 제지시켰다.     


“증거 있어요?”    

 

나는 맞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빰을 내밀어 보여줬다.     


“여기요!”    

 

지혜와 매니저가 허리를 굽혀 내 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매니저는 대번 소리쳤다.      


“여기 어디?”     


“잘 보세요. 맞은 자국 있잖아요.”     


“무슨 자국이 있다고 그래!”     


얼굴이 구릿빛이라 변색한 부분이 잘 보이지 않나? 그러나 람야이는 정확히 내 빰 맞은 부분을 가리키며 대변해 주었다.    

 

“이거 맞은 자국이에요.”    

 

“잘 안 보이는대요.”     


지혜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말했다. 순간 매니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 보이죠? 이사님이 안 보인대잖아.”     


“분명히 때렸어요. 씨씨 티브이 봐요.”     


람야이가 나섰다. 하지만 지혜는 한국인 매니저를 힐끗 보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곤 냉랭하게 덧붙였다.      

“회사 시시티브이 함부로 볼 수 없어요. 회사 보상금 나오니까 그걸로 합의하세요.”    

 

“그래 이 새끼야! 좋게 좋게 가!”     


그러나 나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다. 다리를 다친 게 문제가 아니다. 감히 빰을 때리다니. 나를 모욕하는 건가?     


“전 합의 못합니다.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매니저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그때 나선 건 람야이였다.     

 

“제가 증언할 거예요. 제가 봤어요.”     


역시 람야이는 신뢰할 수 있는 여자다. 나는 마음이 쑥 내려앉으며 안심이 되었다. 이 말을 지혜에게 듣기 전까지는.      


“같은 태국 사람 말을 믿을 수 있나?”     


지혜가 냉랭하게 말을 하자 나도 람야이도 당황했다.   

   

람야이     

아농낫이 분명히 매니저에게 맞았는데 그런 명백한 사실을 없었다고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나는 너무 기가 막혔다. 내가 항의하자 지혜는 병실 밖으로 나를 불러 냈다. 어두운 밤이라 오가는 사람도 없는 복도 한쪽 구석이었다.     


“아농낫 맞았다는 말 난 믿지 않아요.”     


“분명히 맞았어요.”     


“다른 데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농낫은 치료비도 받고 보상금도 받을 거예요. 사원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돼요.”     


이렇게 사실을 숨기려고 하다니. 나는 부르르 몸이 떨렸다.     


“너무 억울해요. 태국 사람이라 때렸죠? 한국 사람이면 안 때렸을 거잖아요.”     


지혜가 잠시 말을 못 했다. 그러나 다시 말을 이었다. 냉랭한 목소리였다.      


“람야이 사원님, 사원님 이제 1개월 수습 기간 끝나가죠? 정식 계약 전에 계약 해지할 수 있습니다.”    

 

수습 기간? 그런 게 있었나? 찬찬히 생각하니 맞다. 처음 이 회사 와서 근로 계약서에 사인할 때 1개월 수습 기간 후 정식 계약을 다시 맺는다는 조건을 들었다. 그때는 무슨 얘긴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런 거였구나. 얼굴이 하얘졌다.   

  

“계약 해지하면 바로 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알죠?”  

   

충격이 밀려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아들은 걸로 알게요.”     


지혜가 덧붙이더니 돌아섰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그녀를 불렀다.    

  

“이렇게 억울하게 당할 순 없어요.” 

    

의문의 눈으로 쳐다보는 지혜 앞으로 가서 침착하게 말했다.      


“처음 한국 들어왔을 때 산업인력공단 교육에서 들었어요. 만약 억울하게 해고당할 것 같으면 회사에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는 인사 위원회를 요청할 수 있다고.”     


“인사 위원회요?”     


되묻는 지혜의 얼굴을 나는 똑바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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