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아농낫이 벌떡 일어서서 인사했다.
“아. 네. 지혜 이사님.”
나도 엉거주춤 일어섰지만 눈은 온통 계산대 앞에 선 석훈에게 가 있었다.
“역시 태국 재벌집 아드님이라 이런 데도 오시고.”
지혜가 아농낫에게 인사했다.
“아, 아닙니다!”
인사하는 아농낫의 얼굴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콕 남자만의 거만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지혜가 내 옷차림을 흘낏 쳐다본 것 같다. ‘이거 뭐야!’하는 눈빛이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세련되게 웃으며 아농낫에게 이렇게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즐거운 데이트 하세요!”
나도 체면을 차려야 했다. ‘안녕히 가세요’하고 인사하는데 계산을 마친 석훈이 뒤로 돌아섰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가 곧 고개를 돌려 나도 모른 척했다.
맛있는 초밥이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아농낫과 기숙사 현관문 앞에서 헤어졌다. 무슨 맛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힘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눕거나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동바이와 마랑이 일제히 쳐다봤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속사포처럼 물었다.
“ไปเดทกับ Nongnot ดีมั้ย? (아농낫이랑 데이트 잘했어?)”
“อะไร... (뭐...)”
마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지만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เก่งมากเลย. ผู้หญิงไทยต้องคบกับผู้ชายไทย! (잘했다. 태국 여자는 태국 남자랑 사귀어야 해!)”
동바이가 다시 강조했다. 겉옷을 벗어 옷장을 넣으며 얘기했다.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ผมไปที่ร้านอาหารหน้าเซ็นเตอร์ ซอกฮุนอยู่ด้วยนะ. (센터 앞 식당에 갔는데 석훈이 있더라.)”
둘이 동시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눈을 반짝였다.
“석훈?!!!”
“อืม. เดทกับผู้อำนวยการจีฮเยน่ะ. (응. 지혜 이사님이랑 데이트하더라.)”
힘없이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สุดยอดเลย! (대박이다!)”
“ซอกฮุนประสบความสำเร็จนะเนี่ย. เป็นเมเนเจอร์นะ เดทกับผู้อำนวยการด้วย. (석훈이 출세했네. 매니저 주제에 이사님이랑 데이트도 하고.)”
동바이가 비아냥거렸다. 소파에 푹 안겨서 둘에게 물어봤다.
“แต่กรรมการจีฮเย... สวยในแบบผู้หญิงเกาหลีมากเลยว่ามั้ย? เสื้อผ้าก็หรูหรามาก. (그런데 지혜 이사님 말이야,,, 너무 한국 여자식으로 예쁘지 않니? 옷도 고급스럽고.)”
“ใช่แล้ว. พวกเราใส่ชุดที่สกปรกทุกวัน. (맞아. 우린 맨날 추레한 옷인데.)”
마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ไม่นะ. ไม่ฮิปเหมือนฉันหรอก. (아니. 나처럼 힙하진 않지.)”
붉은 꽃으로 화려하게 네일한 손을 들어 보이며 동바이가 말했다. 붉은 동바이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สองคนพูดภาษาอังกฤษอยู่ แต่ฟังไม่รู้เรื่องเลย. ฉันนี่ตามผู้หญิงเกาหลีไม่ได้เลยจริง ๆ. (둘이 영어로 얘기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역시 나는 한국 여자를 못 따라갈 것 같아.)”
말하는 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더 소파 안으로 몸을 파묻었다.
다음 날은 야간 근무라 저녁에 기숙사를 나왔다. 그런데 마랑이 나와 동바이를 현관 옆 스쿠터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어젯밤부터 최신형 한국제 스쿠터가 생겼다고 자랑자랑했다. 가 보니 빨간색 신식 스쿠터가 반짝반짝거렸다. 마랑은 한껏 흥분해서 큰 소리로 자랑했다.
“พี่สุชายซื้อสกู๊ตเตอร์มาให้ด้วย! (숫차이 오빠가 스쿠터 사 줬어!)”
“ต้องขอให้ทำแหวนให้สิ ทำไมถึงเป็นสกูตเตอร์!! (반지를 해 달라고 해야지 웬 스쿠터!!)”
동바이가 평소대로 비꼬았는데 마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ขี่ตอนไปทำงาน ดีมากเลย! (출근할 때 타기 좋아!)”
“สงสัยพี่สุโขทัยจะชอบเธอจริงๆ. (숫차이 오빠가 너 진짜 좋아하나 보다.)”
내가 얘기하자 마랑의 얼굴에 환한 빛이 폈다.
“อืม. น่าจะเป็นแบบนั้นแหล่ะ! (응. 그런 것 같아!)”
자랑하고픈 마음을 이기지 못해 얼른 스쿠터 위에 올라타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스쿠터에 꽂았다. 부릉 소리가 났고 마랑이 익숙하게 액셀을 살짝 밟았다. 우리 태국 여자들이야 익숙한 스쿠터 운전자들이지. 태국에서 맨날 스쿠터를 탔으니까.
한국에서는 스쿠터를 타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여기 기숙사에도 센터까지 스쿠터를 타고 출근하는 동남아 친구들이 있다. 걷기에는 살짝 먼 거리니까. 특히 퇴근할 때는 너무 지쳐 있어 스쿠터를 타는 사람들이 부럽다.
“ฉันไปก่อนนะ พวกเธอค่อยๆมาช้าๆนะ! (나 먼저 갈 테니까 너희들 천천히 와!)”
말하고 마랑이 경쾌하게 출발했다. ‘부르릉!’
야간 근무 시작 20분 전 센터장이 모든 매니저들을 불러 모았다. 관리자 휴게실에는 파란 조끼를 입은 약 30여 명의 매니저들이 모였다. 그중에 아농낫도 보였다.
“다들 알지만 오늘이 추석을 3일 앞둔 날이라 주문 물량이 어마어마해요. 1년 중 가장 물량이 많은 날입니다. 가동할 수 있는 라인을 다 열고 계약직은 물론 단기 알바들까지 다 불렀지만 야간작업엔 인원이 좀 모자랍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오늘 물량을 막아주세요. 단체 메시지로 매니저별 할당 사원 숫자 넣었으니까 확인하시고 바로 작업장으로 출발!”
센터장의 말이 끝나자 매니저들 일제히 손에 든 핸드폰을 들어 자신에게 할당된 인원을 확인하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아니 평소보다 2명 모자라는데...’ ‘물량 많은데 모자란 인원으로 어떻게 마감을 맞춰...’ 등등. 성격이 급한 매니저 하나가 센터장에게 항의했다.
“센터장님! 저 2명 모자랍니다. 물량 예상량은 평소의 2배인데 어떻게 마감을 맞춥니까?”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다. 그런데 센터장은 오히려 화를 냈다.
“그래서 내가 얘기했잖아. 최선을 다하라고!”
그러자 다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웅성웅성거리며 흩어졌다. 그때 라인별 인원 배정표에서 이상한 걸 발견하고 부장에게 다가가 얘기했다.
“부장님! 외국인 라인에는 인원이 그대로인데요.”
“한국인 사원들은 추석이라고 많이 쉬지만 거긴 오히려 일을 더 달라고 하잖습니까? 수당 붙는다고.”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서는데 문을 나가는 아농낫이 보였다. 환한 얼굴이었다.
그날 밤은 전쟁이었다. 원래 추석 직전은 1년 중 가장 주문이 많은 때이다. 8월부터 이미 추석 피크 때를 대비해서 시설과 인원 모든 것을 최대치로 올렸다. 자정이 넘어 새벽 3시가 넘어가니 모든 라인에서 연기가 나는 듯했다.
10킬로 쌀포대와 커피 믹스 100개들이 25킬로 박스 같은 추석 선물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 포장 작업대 옆으로 줄을 서서 대기하고 노동자들은 숨 쉴 사이도 없이 일하고 있다. 게다가 인원까지 모자란 관계로 매니저들은 마감을 맞추기 위해 뛰어다니며 소리까지 치고 있다. 나도 이리저리 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라인은 2자리가 비어 있는 반면 바로 옆 라인 외국인 라인은 빼곡하게 차 있고 일도 잘해 빠르게 물건들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 5시가 가까워져 마지막으로 새벽 ‘5:30분’ 마감이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라인 상품 박스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나도 상품 박스가 올려진 카트를 미친 것처럼 옮기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때 조끼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스티브였는지 알았으면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바빠서 엉겁결에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핸드폰 너머에서 스티브가 비아냥 거렸다.
“잘 돼 갑니까?”
‘이 새벽에 전화라고? 이 새끼 나를 죽이려고 드는 건가?’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핸드폰을 팍 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예의가 바르다.
“네. 잘 되고 있습니다.”
“아하! 진실을 얘기하셔야지. 나도 거기 데이터 다 보는 거 알고 있지요?”
또 비꼬고 있다. 알고 있으면 전화를 왜 했는가? 하지만 아무 말 안 했다.
“너무 느린데. 느려도 너어무 느려. 오늘도 마감 못 칠 것 같은데...”
인원이 모자란다는 얘기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대신 소리쳐 줬다.
“마감 맞춥니다. 맞춘다고요.”
“30분 남았는데 두고 보자고요.”
끝까지 스티브가 비아냥거렸다. 아무래도 마감을 못 맞출 것 같았다. 급하게 나는 빈 작업대 하나로 들어가 박스 포장을 시작했다.
그때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따뜻한 눈길 같아 뒤돌아 보니 람야이였다. 그녀가 작업대에 들어와 컴퓨터에 로그인하고 포장을 시작했다. ‘그쪽 라인 마감은 끝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이 끝나고 온 건가?’ 하고 생각하며 너무 고마웠지만 말할 시간도 없었다.
람야이가 빠르게 포장을 하는데 옆에 아농낫의 목소리가 들렸다.
“หมดเวลาแล้วทำงานที่นี่ทำไมคะ. เหนื่อยแต่ก็ต้องพักหน่อย. (마감 끝났는데 왜 여기에서 일해요. 힘들었는데 좀 쉬지.)”
“ที่นี่ก็หมดเขตแล้ว ต้องช่วยหน่อยสิครับ. (여기도 마감인데 좀 도와줘야죠.)”
“อย่าสิคะ. ฉันต้องมีผลงานดีกว่าคนเกาหลีนะคะ. (하지 마요. 내가 한국인보다 실적이 좋아야 합니다.)”
람야이가 멈칫한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 말을 듣고 아농낫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자리를 떴다. 동시에 옆에서 동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훈! 비켜요. 내가 할게.”
똥공주가 이렇게? 내가 눈이 커져서 보자 동바이가 내가 든 테이프 커터기를 낫아 채듯 빼앗았다.
“비키라니까!!”
엉겁결에 자리에서 나오자 동바이가 안으로 들어와 포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작업대 자리에서 나오며 보니 마랑이 한국인 라인 통로에 있던 물건이 쌓인 카트를 끌고 자기 작업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 여러 명도 마랑처럼 카트를 끌고 자기 작업대로 들어갔다. 아농낫은 그걸 당황한 얼굴로 보고는 있지만 말리지는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