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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Dec 08. 2024

32화. 사장님은 나빠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제히 자기 작업대에서 우리 라인 물건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로봇처럼 빠른 손놀림. 마음이 울컥했다. 재빨리 관리자 컴퓨터를 들어가 작업 진행 상황을 들여다보니 미완 작업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아침 ‘5:30분.’ 마지막 물건이 레일 위로 올라가고 작업 현황표에서 미완 물건이 완전히 사라졌다. 해냈다!! 통로로 나가 소리쳤다.      


“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람야이가 작업대에서 나와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내가 활짝 웃었다. 람야이도 예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하늘이 뻥 뚫린 6층에는 분홍빛 새벽 여명이 비춰 들고 있었다. 통로는 출퇴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람야이를 금방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유난히 빛이 나는 그녀. 얼른 쫓아갔다.      

“람야이! 잠시만요!”    

 

부르자 람야이가 돌아봤다. 평소처럼 동바이와 마랑이 옆에 서 있었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내가 말하는데 눈에서 아마 울컥하는 물이 넘쳤을 것이다. 람야이가 웃었다. 그 뒤로 분홍빛 새벽빛이 서서히 들어 차고 있었다.     


동바이 

인스타에서 열심히 검색한 핫플답게 강남의 카페는 힙함이 넘친다. 오늘이 태국 PC 방 남자랑 만나기로 한 날이다. 남자는 이틀 전 한국에 들어온다고 연락을 해 왔고 여기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어제 도착한 후 다시 연락하지 않은 것이 약간 이상했지만 일단 나왔다.      


2개월이나 연애를 쉬고 다시 만나는 남자이니만큼 신경을 무지하게 썼다. 3시간 가까이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몄더니 머리가 좀 어질어질하다. 내가 다 좋은데 빨간 머리가 좀 그렇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언니를 통해 전해 듣고 얼마 전 머리를 탈색했다. 탈색한 머리가 푸석푸석해 최대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묶어 뒤통수에 붙이고는 실핀을 잔뜩 꽂았다. 그거 하는 데에만 1시간 걸린 것 같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1시간이 넘어가도 남자가 나타나질 않는다. 핸드폰으로 계속 연락을 해도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건 공주로서 할 일이 아니다! 화가 나서 일어났다가 경기도 구석 센터에서 나와 강남 시내까지 온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이러고 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일어서려는데 영상 통화가 떴다. 그였다.     

 

“รอกันนานเลยใช่มั้ยครับ? (많이 기다리셨죠?)”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뽀로통한 얼굴로 억지로 대답했다.      


“ไม่ใช่ค่ะ. เพิ่งมาเมื่อกี้ค่ะ. (아뇨. 방금 왔어요.)”     


“โล่งอกไปทีนะครับ. (다행입니다.)”


“ทำไมไม่มาคะ? (왜 안 와요?)”     


내가 묻자 남자가 절망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처음 핸드폰 화면에 나타났을 때부터 흐린 얼굴이었다는 걸 내가 눈치 못 채고 있었다.      


“เรื่องนั้น... ไม่ได้ไปเกาหลีครับ. (그게... 한국에 못 갔어요.)”     


너무 놀라 절로 몸이 앞으로 나갔다.     


“ครับ? ทำไมหรอครับ? (네? 왜요?)”     


남자 목소리가 더 절망적이었다.      


“ไม่ได้วีซ่าครับ. ท่านประธานเกาหลีทรยศฉันค่ะ. (비자 못 받았어요. 한국 사장님이 나 배신했어요.)”     


“แปลว่าอะไรหรอครับ? (무슨 말이에요?)”     


“ฉันรอจนถึงเมื่อวานนี้ แต่เจ้าของร้านเกาหลีไม่ส่งสัญญาจ้างใหม่มาให้ค่ะ. (어제까지도 기다렸는데 한국 사장님이 재계약 근로 계약서를 안 보내줬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졌다. 이건 세상 무너지는 일이다. 남자는 거의 울다시피 했다.      


“เห็นบอกว่าจะส่งใบสัญญาการทำงานมาให้ฉัน ก็เลยมาที่นี่ ทีนี้ก็กลับเกาหลีไม่ได้แล้วค่ะ. (나한테 근로 계약서 보내준다고 해서 여기 왔는데 이제 한국 들어갈 수 없어요.)”   

  

이건 우리가 보는 sns에 가끔 올라오는 얘기다.      


“โดนนักต้มตุ๋นจับได้นะเนี่ย.โกงเพื่อไม่ให้เงินบำเหน็จบำนาญสินะ! (완전 사기꾼한테 걸렸네. 퇴직금 안 주려고 사기 쳤구나!)”     


거의 4년 일한 외국인 노동자가 E9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고용주의 재계약 근로 계약서가 있어야 하고 태국에 일단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재계약 근로 계약서가 약속한 기한에 들어오지 않으면 태국에 있는 당사자는 E9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장님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그에게 퇴직금을 받지 않으면 재계약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태국으로 보낸 후 근로 계약서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퇴직금을 떼먹기 위해서.      


남자는 거의 정신이 나간 눈빛이었다.      


“เจ้าของร้านเกาหลีนิสัยไม่ดีค่ะ! ยุ่งมากจนไม่สามารถติดต่อได้ล่วงหน้าค่ะ. ขอโทษนะครับ! (한국 사장님 나빠요! 너무 정신없어서 미리 연락도 못 했어요. 미안해요.)”   

  

“한국 사장님은 나빠요!”     


영상 통화가 끊겼는데 선 채로 큰 소리를 질러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볼 테면 보라지! 태국어 욕이 저절로 튀어나와 소리 질렀다.     


“ไอ้คนที่ต้องโยนหลุมไฟตลอดไป! คนที่ต้องตกนรกแล้วกระโดดออกมา แล้วกระดูกก็โผล่ออกมา! (영원히 불구덩이 던져져야 하는 놈! 불신 지옥에 떨어져 내장이 튀어나오고 뼈가 아작 나야 하는 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따꼼거리던 뒤통수 실핀을 마구 뽑아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뽑혀서 ‘아얏! 아얏!’ 했지만 신경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산발이 되어 갔다.    

 

마랑

심장이 쿵쿵 띈다.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2층 보안 출입구 앞에 앉은 보안 요원을 보자 손에서는 땀이 맺히고 얼굴이 하얘졌지만 침착해야 한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 뭉쳐 넣어 둔 고무줄 천 보자기를 확인하는데 그 속에 있는 스쿠터 열쇠도 잡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보안대 앞을 지나는데 다행히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휴! 다행이다. 보안대를 무사히 나와 서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앞으로는 상품들이 빼곡히 박힌 선반들이 천장까지 올라가 줄지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오늘 2층에는 유명한 핸드폰 기계들이 무더기로 들어와 있다. 오늘이 기계가 나가는 날이다. 핸드폰 기계 포장을 한다고 어제 작업 지시가 들어왔다. 나는 이미 3년 동안 2번이나 공기계 핸드폰 포장 작업을 해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오래 일하고 평소 근무 성적이 좋은 직원들만 하는 작업이다. 

      

2층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도 안다. 일반 상품이 있는 섹션을 지나 구석 자리에 찾아 가자 핸드폰 기계가 가득 찬 박스가 수십 개 쌓여 있었다. 한 박스당 약 50개가 들어 있으니 한국 돈으로 치면 박스당 수천만 원이 넘는다.      


일단 카트를 찾아와 섹션을 찾아가자 평소대로 사람들도 별로 없다. 섹션 통로에 카트를 세우고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누가 언제 올지 모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쌓여 있는 박스 하나를 카트 위에 들어 올렸다.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주변을 살피자 아직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얼른 다른 박스를 들어 올려 카트 위에 올렸다. 6 개쯤 올리자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기계로 가득 찬 박스 6 개를 올린 카트를 끌고 벽 쪽에 있는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봤다. 2층 아래가 아득하다. 하지만 곧 손을 흔드는 숫차이 오빠가 보였다. 트럭 위에 서서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트럭 뒷 칸은 계획대로 넓은 에어 매트가 펼쳐져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고무줄 보자기로 박스 위를 덮었다.    

 

그리고 선반 옆에 서 있는 작은 사다리를 집어 와 창문을 깼다. ‘와장창!’ 소리가 2층 창고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멀리서 ‘뭐야!’ ‘누구야!’하는 소리가 들리며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얼른 물건이 가득 찬 박스를 들어 아래로 떨어뜨렸다. 최대한 물건이 박스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조심그럽게. 아래에는 숫차이 오빠가 기다리고 있다. 뒤에서는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미 끝난 일이다.     


다른 박스를 집어 연이어 떨어 뜨렸다. ‘저기다!’ ‘물건 던지고 있어!’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들이 선반 사이 통로로 달려왔다. 이렇게 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절도다!’ ‘핸드폰 절도닷!’     


너무 무서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머릿속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바보같이 서 있자 그들이 거의 다 다가왔다. 창문 너머 아래를 흘낏 보니 에어 메트를 접고 트럭이 떠나가고 있었다. 숫차이 오빠는 태국에 건너가 있으면 찾아가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내 양팔을 잡았다.     


양 팔이 사람들에게 잡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끌려 나왔다. 끌고 가는 보안 요원은 무전기로 큰 소리로 보고를 했다.      


“대량 절도 발생했습니다! 대량 절도 발생했습니다.”     


무선기에서는 ‘경찰에 바로 신고함! 경찰에 바로 신고함!’이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각오한 일이었지만 가슴이 떨렸다. 소리 탓인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보며 웅성거렸다.   

   

‘또 동남아 사람이네!’ ‘원래 동남아 애들은 그런가 봐!’ 등등. 람야이와 동바이도 내 소식을 들었을까? 이런 일에 대비해 기숙사 방에 편지를 써 뒀는데 읽을까?     


람야이

3층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랑이 없어져 이상했다. 화장실에 갔나 생각했지만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내가 동바이에게 어디 갔을까 얘기하며 걱정하고 있을 때 2층에서 대형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동남아 여자라는 소리를 듣고 나와 동바이는 불길한 예감에 그대로 뛰쳐 나갔다.    


*람야이 2화 조회수가 2천을 넘어갔습니다. 사실 소설이라 다음 메인에 오르기 어려운데 지난 화는 '간단한 태국어'라는 검색어로 들어온 조회수가 높았어요. 드디어 태국어가 먹히기 시작하나 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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