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나자 마랑의 절도 사건도 점점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 갔다. 같이 일하는 외국인 동료들은 나와 동바이를 별스럽게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포장을 하는 나의 기술을 보고 한국인 아줌마들은 엄지 척을 해 주었다. 회사가 다양한 포장 기술을 도입하고 실험하는 바람에 여러 포장 방법을 겪었다.
점심시간은 오전 내내 힘든 일을 한 후, 배를 채우고 힘을 얻고 쉴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자 동료들과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드문 시간이기도 하다. 평소대로 외국인 라인 동료들과 한쪽 테이블에 모여 앉아 식판을 앞에 두고 얘기를 하며 밥을 먹었다.
“집품하는 장소와 포장하는 장소가 다른 층에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둘이 같은 층에 있으면 집품한 다음에 바로 포장장으로 가서 훨씬 빠르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은 동바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새로 빨갛게 메뉴쿠어 한 손톱만 살피고 있다. 외국인 동료들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몽골, 아프리카 등등 여러 국적이라 평소에는 한국어로 소통한다.
그런데 뒷자리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소리인지는 알았다. 석훈이다. 아까 배식대에서부터 식판을 들고 따라오며 이 쪽을 흘낏 흘낏 보고 있었다. 급기야는 내 뒤 편 테이블에 식판을 놓고 앉았다.
“집품장이랑 포장장을 바로 레일로 연결해서 집품한 박스를 오토 포장대로 바로 이동시키면 훨씬 빨라.”
내가 말하는 데 옆에서 기척이 들려 돌아보자 석훈이 식판을 들고 외국인 노동자들 무리 끝 비어있는 의자에 앉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반짝이며 나를 봤다.
“집품한 사원이 pda에서 비어 있는 포장대로 가도록 지정할 수 있도록 바꾸고.”
거기까지 말했는데 열기가 느껴져 돌아보자 석훈이 바로 옆에 서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흠찟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밥 먹는 건 잊은 것 같았다.
“저기! 람야이! 그거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다들 밥 먹다가 멈추고 쳐다봤고 나는 당황했다. 그때 옆에 앉은 동바이가 팔을 툭 쳤다.
“พวกเราต้องรีบไปพักแล้ว! ตอนเช้าฉันเหนื่อยมาก ต้องพักสักหน่อย ตอนบ่ายจะได้ทำงานอีก! ไม่มีเวลาคุยแล้ว. ถ้ากินเสร็จแล้วตื่นนะ! (우리 빨리 가서 쉬어야 해! 오전 내내 너무 힘들었는데 좀 쉬어야 오후에 또 일하지! 얘기할 시간 없어. 다 먹었으면 일어나!)”
동바이가 갑자기 식판을 들고 일어섰고 옆에 있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일제히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하긴 벌써 다들 밥을 거의 다 먹었다. 엉겁결에 나도 일어섰다.
“저기... 나중에.”
내가 석훈에게 말하자 다들 돌아봤다. 식당 안에 너무 눈들이 많다. 한국인 노동자 눈들, 외국인 노동자 눈들. 내가 석훈이 여기에서 다정하게 얘기한다면 소문이 다 나서 왕따가 될 것이다. 동남아 여자가 한국인 매니저를 쫓아다닌다고 스캔들이 될 것이다.
서둘러 식판을 들고나가는 동바이를 쫓아갔다. 석훈이 쳐다보는 눈빛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중요한 걸 묻고 있는데 그냥 가다니... 하긴 주변에서 너무 많이 쳐다봤다. 한국 남자가 동남아 여자를 쫓아다녀서 그런가? 아니면 매니저가 일반 노동자를 쫓아다녀서 그런가? 숱한 눈길을 느끼면서도 무작정 들이대는 나는 또 뭐란 말인가?
점심 식사 후 포장장에 돌아와 다시 일하면서도 레일 너머 람야이를 자꾸 힐끗힐끗 보게 된다. 람야이는 못 본 체하고 일은 바쁘게 돌아가서 결국 가서 말을 걸지 못했다.
오늘도 없어진 물건 찾느라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포장장을 나오니 하늘이 벌써 어둑어둑하다. 무작정 센터 뒤편 기숙사를 찾아갔다. 집품장과 포장장을 바로 연결하자는 람야이의 아이디어를 쫓아간 건지, 그냥 람야이를 쫓아간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쫓아가고 싶은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전화번호는 안다. 핸드폰으로 람야이를 찾아내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된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보면서도 손가락이 안 눌러졌다. 용기가 안 났다. 차라리 얼굴을 보면 말하기가 수월한데 전화 걸기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숙사 앞으로 무작정 찾아가는 게 마음 편했다.
기숙사 저녁 식사 시간도 지났다. 람야이도 아마 밥을 먹었을 것이다. 밥을 먹고 산책이라도 나오겠지. 벌써 주변은 어두워졌고 희미한 기숙사 현관등이 켜졌다. 그러나 그 앞에 서 있는 내 마음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국어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태국 친구들이 나타났다. 람야이와 아농낫도 그중에 있었다. 다들 좀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람야이가 나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그러나 말을 건 건 역시 동바이였다.
“어멋! 매니저님이 웬일이에요?”
람야이만 보고 싶었는데 한꺼번에 다 보다니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어... 그게....”
“일 끝났어요. 우리한테 일 얘기하지 마세요. 얘들아! 가자!”
동바이가 똥리더답게 태국 무리를 이끄는데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1시간 기다린 노력을 그대로 버릴 순 없어 람야이에게 다가갔다.
“아까 점심시간 때 식당에서 말인데요 집품장과 포장장을 같은 층에서 바로 레일로 연결하자는 솔루션 말입니다.”
람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다들 ‘웬일이야’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거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 수 없어요?”
람야이가 어이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거 때문에 여기 왔어요?”
그런데 동바이가 끼어들었다.
“지금 근무 시간 아니에요. 야! 우리 시간 늦었어. 나이트클럽 가야지.”
동바이는 태국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아농낫이 나서서 태국어로 뭔가 말했다.
“ฉันก็เลยบอกแล้วไงคะว่าให้ขึ้นรถฉันไปก่อน. (내가 그래서 내 차 타고 가자고 했잖아요.)”
“เพราะทุกคนไม่สามารถนั่งรถคันนั้นได้. (다들 그 차에 탈 수는 없으니까.)”
람야이가 태국어로 아농낫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나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더 궁금했다.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 가요?”
“네. 그게.”
“거기 얌 추띠마 왔어요. 우리 그 가수 공연 보러 가요. 야! 빨리 가자! 버스 시간 다 됐어!”
람야이가 다시 설명하려는데 동바이가 나서서 소리쳤다. 그러자 태국 친구들이 ‘빨리 가자!’ 소리치며 뛰어 나갔다. 람야이가 뛰어 나가는 친구들을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그 가수 공연 이번에 못 보면 앞으로도 못 볼 것 같아서 빨리 가야 해요.”
그 사이 동바이가 돌아와 람야이의 팔을 끌다시피 하며 달려 나가고 아농낫과 동료들이 람야이를 둘러싸듯 달려 나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들을 쫓아갔다.
“같이 가요!!”
태국 친국들이 달려 나가고 나도 람야이를 쫓아 달려 나가 센터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내가 좀 바보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들을 놓칠까 봐 체면 따위는 구겨버렸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태국 친구들이 소란하게 소리를 지르면 손을 흔들자 버스가 멈춰서 문을 열었고 그들은 우르르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멈칫했지만 람야이가 버스에 올라타며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래서 자석에 끌리듯 버스에 마지막으로 올랐다. 뛰어 오느라 숨을 헉헉거리며 버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바로 뒤에서 닫혔다. 퇴근 시간이라 버스 안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버스를 탄 게 1 년 전이었던가? 2 년 전이었던가? 버스 안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걸 본 게 몇 년 만이다.
버스 운전사가 눈치를 주길래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서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꺼내 단말기를 터치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 속에서 태국 친구들이 무리 지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나도 사람들을 헤치고 그쪽으로 갔다. 버스가 이리저리 도느라 나도 흔들렸다. 태국 친구들 무리 속에서 람야이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람야이를 부를 수 없었다.
동바이와 태국 친구들은 ‘별꼴이야!’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숙덕거리고 람야이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동바이는 뭔가 태국어 (뱀 같은 놈하고는 말하지 마!’)로 람야이에게 속삭이고 아농낫은 몸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도 많아 꼼짝달싹 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멈춘 곳은 인천 유흥가였다. 다들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따라 내려 보니 빨주노초파남보 레인 사인 불빛이 번쩍거리고 사방에는 술집, 여관 간판들이 어지럽게 겹쳐져 있었다. 지저분한 좁은 골목에는 화려하지만 촌스러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경기도 구석에 이렇게 촌스러운 곳이 있었던가?
태국 친구들이 발길을 옮기는 방향에는 ‘나이트클럽’이라는 글자가 크게 박힌 풍차가 번쩍거리며 돌아갔다. 태국 친구들은 흥분한 듯 ‘와! 대박이다!’ 소리치며 빠르게 나이트클럽으로 걸어갔다. 람야이도 아농낫과 동바이 사이에 끼여 걸어가며 나를 힐끗힐끗 보기는 했다. 클럽 앞에 도착하니 태국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나 같은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태국말이 들여왔고 그들은 화려하고 촌스러운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나는 ‘람야이’를 불렀지만 사방이 너무 시끄러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태국 사람들 물결에 실려 그냥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끄러운 음악이 쿵쾅거리며 울리고 화려한 조명이 이리저리 비추며 돌아갔다. 가운데 있는 넓은 플로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조명 볼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바깥쪽으로는 둥근 나이트클럽 테이블마다 붉은 조명이 밝혀진 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곳은 거의 처음이라 머리가 빙빙 돌아가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람야이 무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홀 테이블 중 하나로 갔고 나는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쫓아갔다. ‘람야이’를 거듭 불렀지만 너무 시끄러워 말도 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들이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 하나를 잡고 둘러앉는데 나는 그 옆에 도착해 잠시 머뭇했다.
태국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는데 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동바이가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태국어로 뭐라고 소리쳤다.
“ตามมาถึงนี่เลย. เด็กๆ ส่งที่มาให้หน่อย. (여기까지 쫓아왔네. 얘들아 자리 좀 내 드려.)”
“네! 똥공주님!”
태국 친구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의자 끝자락에 자리를 내주었고 나는 엉덩이를 밀어붙여 앉았다. 그걸 보는 람야이는 어이없다는 듯 아니면 재미있다는 듯 보고 웃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고 나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나 나와 람야이 사이에는 동바이와 아농낫이 있어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