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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Apr 10. 2024

바라보는 봄!

창비 시선 500 기념 시선집 중에서

창작과 비평에서 4월 1일 '창비 시선 500 기념 시선집'을 냈는데요 너무 반가웠습니다. 시는 너무 좋아하지만 일일이 시집을 찾아 읽지 못하는 제 게으름을 단번에 해결해 줘서 바로 책을 주문했지요. 


또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봄이 아니겠어요? 시를 읽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창비가 용서해 주실 것을 믿고) 이 봄에 어울리는 시 세편만 골라 꽃사진과 함께 올립니다. (나머지도 좋은 시들이 너무 많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 시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런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함께 하는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하는 내용이에요. 판단도 하지 말고 성과를 다투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바라보자는 내용이 봄과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길지도 않는 봄 속에 있으면서.



크고 화려한 벚꽃도 하나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겠지요.


꽃씨


고형렬 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모든 꽃은 자신이 정말 죽은 줄로 안답니다.

꽃씨는 꽃에서 땅으로 떨어져

자신이 다른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몰랐답니다.


사실 꽃들은 그것을 모르고 죽는답니다.

그래서 앎대로 꽃은 사라지고 꽃씨는 

또다시 죽는답니다.


모진 추위에 꽃씨는 얼어붙는답니다.

얼어붙은 꽃씨들은 또 한 번 자신들이 죽는 줄로 안답니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약속과 숙지가 없었습니다.

오직 죽음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꽃씨들은

꽃을 피웠지만 다시 살아난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꽃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작년의 꽃을 모릅니다.


그 마지막 얼었던 꽃씨들만 소란한 꽃을 피운답니다.

돌아온다는데 꽃이 소란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꽃들의 부활을 노래하는 듯합니다. 죽은 것처럼 얼어붙었던 씨앗에서 마침내 화려한 꽃들이 소란스럽게 피어나는 것을 보며 우리 생도 어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벚꽃보다 먼저 봄이 오는 걸 알린 꽃도 있습니다. 목련.



목련


이대흠 시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에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에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목련꽃송이는 하늘에 모셔두고 나는 꽃받침이 되겠다고 하는 그리움이 절절합니다. 꽃송이는 흔들리고 언젠가는 바람에 지겠죠. 그게 사랑의 습관이라고 합니다. 아름답고 쓸쓸한 시구입니다.


시 읊기게 좋은 날들, 누구의 시라도 좋으니 시 한 편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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