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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Jul 21. 2024

한국 근현대 자수전,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국립 현대 미술관 덕수궁 전에서는 지금 한국 근현대 자수전이 열리고 있는데 이게 굉장하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혼자 다녀왔습니다. 소문대로 굉장했습니다.

    

자수는 왕가 사람들의 궁중의 예복이나 평생에 한번 혼례복으로 평민들이 입는 예복에 수놓은 화려한 자수만 알고 있었는데요 전시회에서 이런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전시에 들어가는 입구는 이런 화려한 자수로 시작합니다.     


왕가의 공주가 결혼식 때 입었던 예복이 섬세한 자수로 연꽃과 모란, 봉황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 예복은 지금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게 이번 전시회를 위해 들여왔다고 합니다. 조선 말기 고종이 보스턴 박람회에 조선을 알리기 위해 보낸 물건들 중 하나로 박람회가 끝난 후 그냥 보스턴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가 아는 자수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또한 양반가에서는 병풍에 자수를 수놓았지요. 소나무와 꽃사슴, 학과 매화 등 십장생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어 조선 양반다운 품격을 드러냅니다.



 이런 자수 작품의 밑그림 즉 도안은 당대 유명 화가들이 그렸고 보통은 그 위에 여성들이 바늘과 실로 수를 놓습니다. 따라서 자수는 예술이라기보다는 공예로 취급됩니다. 저도 이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수 병풍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수놓은 것입니다. 지금도 귀하게 보관하고 있어요.    

  

보통 위의 그림과 같은 화려한 자수 작품과 달리 미국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작품은 대단히 문과적인 작품입니다. 


검은 천에 금색 실을 사용하여 제사에 쓰이던 제기들과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한문으로 수놓았습니다. 단아하고 품격 있는 차분함을 줍니다. 19세기말 작품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족두리와 주머니에 수놓아진 자수도 참 예뻤어요. 


옆에는 자수가 놓인 수저집과 안경집도 있었는데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생활 용품들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이런 수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놓았는데요 그녀들의 솜씨와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공적 활동이 제한되던 시대에 살았던 여성들은 이런 생활 소품을 통해 일상의 반복되는 구질구질함을 벗어나 자기표현을 할 수 있어서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로 넘어가면서 자수는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데요 종교화 같은 이 작품은 일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 예술 전문학교의 학생이었던 전명자가 일본에서 만든 자수 작품입니다. 검은 천에 사물이 밝은 빛을 밝게 빛나는 지점만을 수놓는 기법으로 제작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작업이 많지 않아 염직물 공방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전명자처럼 일제 강점기 때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일본 도쿄에 건너가 ‘여자 미술 전문학교 (현 여자 미술학교)’에서 자수를 전공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수 교사 자격증이 나와 조선으로 돌아가 교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유학을 가는 여성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겠지만 그녀들은 이런 경로를 통해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자수 밑그림 도안은 대부분 화가들이 그려 주었다고 하네요. 자수가 공예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위 작품은 자수 부분에 매끄럽게 광택이 나는데 실을 꼬지 않고 홑실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건 일본 자수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와 달리 조선 자수는 실을 꼬아 겹실로 자수를 놓았기 때문에 자수에 입체감이 만들어집니다.   

  

공작이 날개를 활짝 편 화려한 이 작품은 ‘등꽃 아래 공작’으로 1939년 숙명여고 여학생들이 단체로 만든 병풍입니다. 


이 자수도 또한 유명 화가에게 밑그림을 받아 단체로 제작한 작품으로 일본풍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과는 다른 자수도 있었는데 한반도 위에 무궁화가 그려진 이 자수 작품은 1945년 독립 운동가인 남궁억이 그린 도안을 바탕으로 이름 모를 여인들이 삼베에 수놓은 작품입니다. 


비단 위에 홑겹실로 자수하던 일본류의 작품과 달리 삼베 위에 꼰 실로 수를 놓아 화려하지만 투박한 정신이 드러납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 자수의 자유로운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자수 작가들이 직접 밑그림을 그리고 자수를 놓는 예술적 경향이 강해집니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최유현의 이 자수 작품은 강한 입체주의적 미술 화풍을 드러냅니다. 



왼쪽 빨간 부분은 태양을, 아래쪽 파란 부분은 새를 나타낸다고 하더라고요. 파랑새는 작가 스스로는 나타내는 것으로 이번 전시회의 주제인 태양 즉 예술의 완성을 쫓는 자수 작가들이 노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최유현 자수장은 이런 추상적 자수 작품 외에도 1970년대 동시에 화려한 모란 병풍도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역시 국가 무형 문화재 제81호인 자수장 한상수의 작품이지만 전시장에는 비슷한 최수현 자수장의 자수 병풍도 있습니다. 모란 병풍은 당시 부잣집들 최고의 혼수 용품으로 줄을 서서 작품을 받아 갔다고 하네요.      


박을복 자수장의 이 작품도 강한 피카소식 화풍을 보여 줍니다. 


피카소의 작품을 따라한 것 같지만 밑그림도 직접 그렸고 비단이 아닌 마직 천 위에 실을 꼬아 자수를 해서 강한 촉감성이 드러납니다. 1952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공예부 입선 작품으로 이 작품처럼 자수 작가들은 강한 실험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1960년대, 70년대에 많이 만듭니다.     


거친 마대천 위에 여러 가지 천 조각을 붙이고 꼬은 실로 수를 놓아 전위적인 이 작품은 강한 실험성을 보여줍니다. 


송정인 작가가 제작하여 1967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문교부 장관상을 받은 작품으로 작가의 강한 실험 정신을 드러내 줍니다. 송정인 작가는 자수 기법을 익히는 것 못지않게 현대 미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검은 비단 천 위에 수를 놓은 이 작품도 특이합니다. 


전통적인 연꽃 위로 죽은 자의 손 뼈가 항아리 위로 성수를 뿌리고 연 잎 아래에서는 거북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연작인 다른 검은 천 위에는 전통적인 연꽃과 새, 나비들이 나오지만 자세히 보면 물속으로는 슈퍼맨이 거꾸로 처박히고 있습니다. 2,000 년대에 나온 이 자수 작품은 1970년대 출생한 이인선이 만든 것으로 그림은 기본적으로 조선 민화에서 왔지만 거기에 서양적인 요소들을 혼용하여 썼습니다. 이인선 작가는 미국 군인들의 문신에서 영감을 받아 기계 자수 (오버 로크)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키 큰 검은 나무 위에 연둣빛 물이 오르는 이 자수 작품은 ‘봄 숲’입니다. 


강신희 작가가 2020년 재활용 담요 위에 실을 거칠게 사용하여 만든 작품입니다. 1960년대 추상적 기법의 자수 작품들과는 달리 사실적인 풍경화입니다. 그러나 작품의 소재는 매우 실험적입니다. 자수 실을 거칠게 쓰고 매듭을 맺지 않아 담요 위의 실들이 이리저리 삐죽거리고 뽀송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작품에 거친 촉감이 느껴집니다.      


꽃 무리가 마치 움직여 나올 듯한 이 자수 작품은 ‘성화’라는 작품으로 손인숙 작가가 만들었습니다. 

1988년 올림픽을 모티프로 만든 이 작품을 위해 작가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틀에 씌운 빈 천 위에 즉흥적으로 마음과 몸을 움직여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하네요. 인상주의적, 행동주의적 미술 사조를 보는 듯합니다.     


무겁게 내려진 회색 구름 아래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 앞에 바람을 맞으며 혼자 선 중년 여성의 뒷모습이 짙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회색빛 하늘과 몰아치는 파도는 마치 험란한 인생을 보는 것 같습니다. 중년 여성의 뒷모습이 내 모습 같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1995년 이장봉 작가가 80살이 넘은 나이에 젊은 날을 회고하며 만들었습니다. 북한 출신인 작가는 북에서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두었지만 한국 전쟁 때 아이를 북에 두고 월남하여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작가의 절절한 감정이 여인의 뒷모습에 고스란히 보이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근현대 자수전 저의 원픽은 이 작품 ‘나는 상처를 받았습니다’입니다. 


작품에는 이라크 전쟁의 참혹한 이미지가 수놓아져 있고 가운데에는 ‘I’M HURT’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자신은 마음이 아프다며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입니다. 함경아 작가가 2009년에서 10년 사이에 완성한 이 작품은 남북 합작입니다. 


작가는 어느 날 자신의 집 앞에 북한 전단이 날아와 있는 걸 보고 자신도 북한에 전단을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자수 도안을 그려 중국에 사는 중개인을 통해 북한 만경대 자수대 자수 작가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작가는 돌아오리라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10개 중 3개가 완성되어 2010년 돌아왔고 그중 하나가 이 작품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행동주의 예술 작품입니다. 

     

작가가 보낼 때는 파스텔 톤 도안을 보냈는데 완성되어 돌아온 자수는 원색이라고 도슨트가 설명했습니다. 북한의 선전주의적 예술 경향을 보여 주죠. 굉장히 재미있고 의미 깊은 자수 작품입니다.   

 

자수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활동 영역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남자 화가가 만든 도안에 맞춰 바늘과 실로 자수를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비록 남자 화가가 도안을 그리거나 남의 작품을 기본 도안으로 삼았지만 누가 자수를 놓느냐에 따라 완성품은 대단히 달라집니다. 생계를 위해, 혹은 생활을 위해 여성들은 자수를 놓았지만 그것을 통해 자기주장을 하고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자수는 여성의 표현 수단이자 독립 수단이었던 셈이죠.     


근현대를 넘어오며 자수는 단순한 생활 용품을 넘어서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넘어갑니다. 즉 공예의 차원에서 예술의 경지로 들어간 겁니다. 해체주의적, 사실주의적, 인상주의적, 그리고 행동주의적 작품들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대부분 여성들인 자수 작가들의 독립적이고 자유 분방한 정신세계와 행동이 자수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작은 파랑새들의 여리지만 끈기 있는 노력이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현장을 목격한 전시회였습니다.     

 

* 저의 다른 연재북 '중년 여성의 품위 있는 알바 생활' 종이책 출간 계약을 맺었습니다. 지난 5개월간 대대적인 수정을 하여 새로운 내용이 많이 추가되었어요. 출판사 대표님이 재밌다고 하시네요.  지금 막바지 수정 중이라 올해 하반기 출간됩니다.


출간 계약에 따라 새로운 필명 '김로운'을 사용합니다. 갑자기 프로필 이름이 바뀌어서 당황하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 그동안 많은 관심과 응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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