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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Jul 28. 2024

인생의 전환기에 만난 초록

약 20년 전 30대 중반, 파견직 근무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서울 강남에서 가장 화려하고 유명한 빌딩에 있는 미국 회사 한국 법인에서 일하고 있었다. 회사 전용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러 들어갈 때 (내가 파견직인지 모르는) 경비원이 인사하는 그런 회사 말이다.      


일주일 전 인사부에서는 예정대로 그날 계약 종료한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앞이 막막해지고 패배감이 짙게 몰려왔다. 내 커리어는 여기 까지는구나. 회사 전용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자리가 있는 18층으로 가는 동안 온갖 상념이 몰려왔다.      


여기서 나는 2년을 일했다. 정규직으로 1년, 그리고 파견직으로 1년. 정규직에서 파견직으로 전환할 것을 통보받던 날의 충격이 생각났다. 그날 아침도 18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원증을 찍은 후 사무실 내 자리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그러자 화면에 뜬 큰 영어 글자는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You’re terminated’     


내가 제거되었다고? 무슨 말이야! 나는 잠시 글자를 들여다보다 마우스를 움직여 아무 데나 클릭했다. 먹히지 않았다. 이번에는 키보드의 아무 글자나 마구 눌렀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고 멍해져 있는데 상사인 부서장이 다가와 말했다.     


‘김 과장! 곧 인사부 직원이 올 거야. 만나봐!’     


‘네!’ 대답을 하자 곧 인사부 직원이 나타났다. 작은 회의실에 들어가 직원은 나에게 서류를 앞으로 내놓으며 말했다.      


‘해고되셨어요’     


아! 제거되었다는 말이 해고되었다는 말이구나!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발밑의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왜?’냐고 묻기도 전에 인사부 직원은 다음 말을 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파견직으로 1년 더 일하겠느냐고?      


원래 해고는 1개월 전에 통고해야 한다. 그런데 사전 고지도 없이 회사는 나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미국 회사식으로 한 것일까? 그러나 당시 나는 그런 법을 모르고 있었고 파견직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그냥 퇴사 서류에 사인을 했다.      


작은 회의실을 나오는데 머릿속이 엉망으로 흩뜨려졌다. 그때 상사인 부서장이 나를 다시 불렀다. 작은 회의실로 다시 들어가 부서장이 한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서장은 평소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그 회사가 합병한 다른 미국 회사에서 넘어온 직원이었다. 합병당할 때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많이 해고당했지만 다행히 나는 살아남았었다. 1년을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그런데 1년이 되는 날 이렇게 해고 통지를 받은 거다. 부서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며 앞으로는 19층 정규직 직원들에게 인사를 깍듯이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기가 막히고 손가락이 떨렸다. 파견직이란 그런 뜻이었다.     

 

정규직이던 1년 동안에도 나는 굴욕적인 일을 많이 겪었다. 그 회사에서도 나는 전 회사와 마찬가지로 마케팅 일을 맡았다. 하지만 출근한 첫날 인사부는 나를 다른 제품 부서로 배치하였고 마케팅 부서가 있는 19층이 아닌 18층으로 자리를 배정했다. 부서장이 있는 바로 그 부서이다. 물론 그 부서 마케팅을 하는 거였다. 나는 자리를 받아들이고 부서장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회사원인 이상 당연한 거다.      


그리고 앞으로 협조해야 할 일이 많은 중앙 마케팅 부서로 인사를 갔다. 부서는 19층에 있었고 19층 굳게 닫혀 있는 유리문 입구에서 나는 직원증으로 보안키를 쳤다. ‘삐!’ 에러가 났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여러 번 더 쳤다. 그러나 계속 ‘삐! 삐!’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19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직원이었다. 굴욕적이었다. 인사부 직원은 그런 사실을 내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이후 1년간 나는 19층 직원의 배려가 아니면 19층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같은 회사 정직원인데 말이다. 그리고 미국 본사의 마케팅 정보는 아무것도 내게 넘어오지 않았다. 전 회사에서는 아시아 본부의 모든 부서로부터 정보를 받아 업무를 진행했던 내게는 너무나 이상하고 굴욕적인 일이었다.      


언론 홍보를 오랫동안 해 친하게 지내던 업계 기자들이 전화를 해 오면 나는 18층으로 오라고 해야 했다. 그러면 그들은 19층에 기자실이 있는데 왜 18층에서 보냐고 물었다. 나는 얼버무렸다.     


그런 일 외에도 19층으로 갈 수 없는 이런저런 굴욕적인 일들을 2년 동안 겪어야 했다. 강남 대로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화려한 빌딩 안에서였지만 나는 비참했다. 전 회사에서 나는 승승장구하는 편이었고 내 능력에 비해 하는 일마다 성과가 좋았다. 그래서 차별과 배제가 더욱 크게 느껴진 것 같다.      


전 회사에 다닐 때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몸조리 후 회사에 복귀해서 일할 때 첫째 아이가 너무 어리고 돌봐 줄 사람이 없어 베이비 시터를 집에 들여 생활했다. 적지 않았던 내 월급은 많은 부분 입주 베이비 시터 월급으로 지급되었다. 주말마다 쉬어야 하는 베이비 시터를 대신해 피곤에 절어 아이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회사에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연이어 몰아닥치는데 퇴근해서도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채 스트레스 속에서 아이를 보았다.     


합병한 회사에서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굴욕감과 소외감을 곱씹으며 장을 보고 저녁밥을 했다. 내 컴퓨터에 ‘회사에서 제거당했다’는 메시지를 본 날, 나는 억울했다. 내 월급을 다 쏟아부었는데도 베이비시터들은 곧잘 그만두었고 그럼 나는 눈치를 보며 하루 휴가를 내야 했고 다른 베이비 시터를 급하게 구했다. 베이비 시터가 빨리 구해지면 다행이었다. 베이비 시터가 빨리 구해지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베이비 시터가 오면 아이는 낯선 얼굴에 울며 내 품에만 파고들었고 겨우 품에서 떼서 출근을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아이가 자주 아팠고 베이비 시터는 회사로 전화를 걸어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또 그만두었다. 허둥지둥 다른 베이비시터를 찾으며 나는 일을 계속했다. 아픈 아이의 고통을 못 본 체하며. 이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회사에서 나를 제거하다니.    

  

더구나 부서장의 비겁한 태도는 나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렸다. 이 회사에는 아무도 내 편이 없었다. 파견직 마지막 날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고 인사부가 와서 노트북과 다른 집기들을 가져갔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서장에게 인사하고 개인 용품들을 가방에 넣어 사무실을 나왔다.      


강남에서 가장 화려한 빌딩 회전문을 나오는데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바쁘게 옆을 지나갔다. 평일 낮 이렇게 한가하게 강남역으로 걸어가는 내가 참 어색했다.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창가에 앉아 내 인생은 이렇게 패배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데 나의 커리어는 끝났다. 나는 회사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여자인데 말이다. 마음이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데 오래된 아파트 단지 내 정원 푸르른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푸르게 살아 있는 것들이 있구나. 지저분한 콘크리트 삭막한 풍경 속에서도 이토록 푸르고 푸르구나! 이게 없었더라면 나는 숨을 못 쉬었겠구나! 다시 큰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살아가야지. 다른 식으로 살아가야겠다.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 결심하게 되었다.      


* ‘이런저런 얘기들’ 연재를 이만 마치겠습니다. 이 연재를 읽어 주신 작가님들,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연재 ‘로맨스 영화의 판타지 속으로’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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