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팀장이 톰에게 말하고 있었다.
“The issue was very difficult to solve in considering many aspects. Good job!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였는데 수고했어!)”
“You’re welcome, Sir! (아닙니다. 선배님!)”
나는 당장 소리쳤다.
“That is my job. not his. Tom simply saw my coding, copied and upload it ahead of me. He just stoled it! (그거 내가 한 겁니다. 톰은 옆에서 훔쳐보고 자기가 먼저 올린 거라고요. 그는 단지 훔쳤을 뿐이라고요!)”
개발 팀장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나 먼저 나선 건 톰이었다.
“What are you talking about! Look at the network. The one who uploaded it is me. I correct the error by myself. (무슨 얘기야? 네트워크 보라고. 내가 먼저 올렸잖아. 분명히 내가 해결했어.)”
나는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편법으로 회사 생활을 이어가는 나쁜 놈이 이제 나한테 시비를 걸고 있다. 내가 ‘퍽킹!’ 소리치며 나서자 팀장이 끼어들었다.
“Calm down, Hun! I am going to investigate and let you guys know. (조용히 해! 석훈! 내가 조사한 다음 어떻게 된 건지 통보할게.)”
할 수 없었다. 회사 생활에서 감정을 폭발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다. 팀장을 믿고 물러 서야 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 건 바로 내가 팀장 사무실을 나와 문을 닫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Don’t you forget we have tennis match this evening! (오늘 저녁 우리 테니스 모임 있는 거 잊지 않으셨죠?)”
톰이 뒤에서 팀장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 팀장이나 나, 그리고 톰은 모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같은 대학을 나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들은 따로 모임을 하고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코카시안끼리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집을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 무리해서 잡았다. 월세를 내기 위해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백인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 아이들은 대부분 금발에 푸른 눈이었지만 교실에서 나는 다정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 나는 알아차렸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어제 누구 집에서 피자를 먹으며 수영을 했다고 얘기를 했고 다른 날은 누군가 생일 카드를 돌리며 꼭 오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번번이 초대받지 못한 아이였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차별 없이 나를 대했지만 나는 부모님에 대해 잘 얘기하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번듯한 직장을 가진 부모를 두었지만 우리 부모님은 흑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마트를 하고 있으니까. 그저 열심히 공부만 했다. 다행히 좋은 대학에 갔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자 금발에 푸른 눈의 친구들이 같은 성적에도 더 좋은 회사,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걸 보았다. 나에게는 억울한 마음, 깊은 상처가 계속 쌓여 가고 있었다.
결국 그 개발은 톰이 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발표가 난 날, 억울한 마음, 켜켜이 쌓인 상처가 터져 나왔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금발에 푸른 눈이 있는 나라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골라 탔다. 태국행 비행기였다. 태국 공항에서 옷과 배낭을 산 후 쑤셔 넣고 시골을 돌아다녔다. 인사팀은 그 뒤로 몇 번 더 연락을 해 왔고 내가 태국에 여행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톰은 내가 개발한 기술을 가로채고 그걸 기반으로 승진한 게 틀림이 없다. 톰은 내 것뿐만 아니라 같은 개발 스튜디오의 여자 동료 것, 독일인 동료 것, 인도 애 것도 곧잘 베껴서 자기 것처럼 떠벌리는 놈이다. 그런 회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인사 팀장에게 소리쳤다.
“I am not never going to come back to company. (절대 회사에는 돌아가지 않는다구요.)”
인사 팀장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찌그러지더니 허겁지겁 다른 제안을 했다.
“Then, you gonna to move to another team (그럼 다른 팀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병현이 형 이름이 떴다. 한국에 가서 회사를 만들겠다던 형, 1년 전까지 같은 회사 영업 부서에서 일하며 친하게 지냈던 한국 형, 사람 좋고 머리 좋고 은밀한 차별을 토로하며 함께 맥주를 마셨던 형. 그 후로도 가끔 연락을 한 사이이다. 전화를 받았다.
“석훈아! 나 서울에서 회사 차리려고 한다. 너 한국 와라!”
방콕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 거리도 화려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구경한 방콕 거리는 휘황 찬란했다. 인도에 다니는 방콕 사람들은 다들 세련되고 멋진 옷을 입었고 도로에는 고향에서는 볼 수 없는 반짝거리는 멋진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동네 친구들에게 들어서 방콕이 우리 동네와는 달리 너무 화려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진짜 방콕스럽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구나. 버스에 타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거리를 둘러보았다.
한국 대사관에는 태국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가려는 태국 사람들이 비자를 가지러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한국으로 일하러 가서 돈을 많이 번 언니가 있다. 1년 전 한국에 간 언니는 때때로 고향 집에 돈과 한국 물건들을 보내왔다. 언니 집에 한국 물건이 오는 날이면 동네 친구들과 가서 구경도 했다.
전기밥솥, 라면, 한국 과자 같은 것들이었다. 언니 부모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언니가 보내 주는 돈으로 곧 집을 지을 거라고 자랑했다. 다들 그 언니 때문에 집이 부자가 되었다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여기와 한국 비자를 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더운 날씨에 메고 온 배낭이 무거웠다. 대사관 앞을 지키는 경비에게 배낭이 한국 사람 것이라 돌러 주려 왔다고 말했더니 들어가는 걸 막았다. 뚝뚝 거리며 퉁명스러운 말투라 마음이 움츠러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없어서 배낭만이라도 돌려줘야 한다고 부탁하자 경비실 안 쪽에 있던 한국 직원이 민원실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민원실은 비자를 받는 태국 사람들로 복잡했다. 창구가 여러 개 있었다. 번호 대기표를 받아 한쪽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있는데 구석 창구가 고급스럽고 한산한 게 눈이 들어왔다. ‘한국인 전용’ 창구였다. 그런데 창구 앞 의자에 앉았던 남자가 일을 마쳤는지 일어나 돌아서는데 턱에 수염이 덥수룩한 바로 그 한국 남자 아닌가?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ขี้หนวด ผู้ชายเกาหลี! ฉันเองค่ะ! ฉันเอง! (수염쟁이 한국 남자! 나예요! 나!)”
그런데 한국 남자는 손에 든 서류를 보느라 못 들었는지 그대로 문을 나갔다. 내 앞으로 여러 태국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서 있어서 못 들었을 것 같다. 나는 급하게 배낭을 다시 메고 남자를 쫓아 나갔다.
남자는 대사관 앞 문을 지나 도로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가며 뛰었지만 무거운 배낭 때문에 빠르지 못했다. 대사관 앞 인도에서 겨우 그를 잡을 수 있었다.
“ฉันเอากระเป๋าเป้มาที่นี่ค่ะ! (여기 배낭 가져왔다고요!)”
그때 남자가 돌아 서는데 눈이 커지더니 내가 어깨에 맨 배낭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거 내 배낭 아니에요?”
* 내일 모레가 추석이네요. 벌써 달이 가득차 오르고 있습니다. 좋은 한가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