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교정서신' 봉사를 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을 교정하고 교화하기 위한 편지 봉사인데, 손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흔치 않은 요즘 시대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 활동에는 몇 가지 제약이 있다. 여성의 경우, 50대 이상만 참여할 수 있고 편지 내용에 개인 정보를 언급해선 안되며, 상대방의 범죄 이력을 물어서도 안 된다. 아마 편지를 통해 발생할 수도 있는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겠다.
엄마는 몇 명의 죄수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 봉사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죄명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교도소인지만 알면 대충 그곳 수감자들의 특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엄마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기 전과와 성범죄 이력이 있었다. 성범죄자라니. 내 기준에선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딸 가진 엄마가 그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냥 싫었다.
그래도 교도소에서 오는 편지 내용은 좀 궁금했기 때문에 이따금 그 편지들을 엄마 옆에서 훔쳐 읽곤 했다. 그중에는 여전히 후안무치인 사람도 있었고, 가끔씩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편지를 주고받는 일도 면목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엄마였으면 평생 사회 나오지 말고 거기서 살라고 했을 거예요"
교도소에서 온 편지들을 읽으며 씩씩대고 있으면, 그래도 그 사람들이 사회 나오기 전에 교정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엄마는 글씨를 꾹꾹 눌러 담았다. 과연 교정이 될까. 저 사람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줘도 될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데, 헛된 기대를 하는 게 아닐까. 엄마가 서신 봉사를 마무리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 활동에 대한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회사에 필리핀 졸업생이(우리는 후원받고 자립한 성인을 '졸업생'이라 부른다) 찾아왔다. 그녀는 본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사회 운동을 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벨트로 딸을 때리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이 착한 딸은 아버지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아빠가 변화될 수 있도록, 아빠가 진짜 사랑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아버지는 변화되었다. 현재 그는 딸이 후원을 받았던 어린이센터의 센터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후원 어린이들의 가정을 살펴보면, 이렇게 문제 있는 부모를 둔 경우가 꽤 많다. 단순히 방임이나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심한 경우, 마약 판매 등의 중대 범죄를 저지르는 부모들도 있다. 그들을 보는 솔직한 나의 심정은 '포기'다. 그들이 바뀌길 바라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쉽게 바뀔 수 없을 거라는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가족을 두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도 갖기 힘든 용기를 내어 그 문제들을 정면 돌파한다. 이들의 방법은 '용서와 화해'이다.
사회적 코드를 어긴 사람에게 '좌표'를 찍고 그들을 '용서가 없는 세상'에 영원히 가둬버리는 우리들과 다르다. 한 번 주홍글씨가 새겨진 사람은 그 뒤의 행보가 죄인이든 성자(聖子)든 상관없이 대중들로부터 무한 처벌을 받는다. 사과를 해도 소용없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니라 벌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 무리에 속해있다. 용서는 엄청난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낙인을 찍는 일은 상대적으로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들이 대견하고 존경스럽다. 과거의 일을 언급할 때마다 눈물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용서와 화해의 과정에서 결국 회복이 일어난다. 개차반이었던 부모가 성실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한다. 마약을 팔던 부모가 벌을 받겠다며 스스로 감독에 들어간다. 자식을 때리던 부모가 다른 아이들을 돕는 봉사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겠지만, 진짜 변하는 사람도 있다. 1000명 중 1명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그 일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일은, 결과적으로 이 사회를 평화롭게 만드는 일이 된다. 비록 계속 배신당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바뀔 수 있고,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