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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Jun 23. 2020

정상을 향했으나 능선만 탔다

절벽(같지도 않은 절벽)에서 조난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산 중턱에서 길을 잃었다(기 보다는) 이 길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인지 확신이 없었다. 사람이 밟고 다닌 길 같았지만, 바위는 너무 가팔랐고 흙은 미끄러웠다. 지도는 용마산 정상과 아차산 정상을 향한 가운데 즈음 우리가 위치함을 알려주었다. 아차산 정상을 향한 길이 너무 가파른 계단 길이라 용마산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아차산 둘레길만 걷고 내려와 다시 용마산 정상을 향한 참이었다. 긴고랑길 계곡을 걷다가 우측으로 가면 아차산 능선길, 좌측으로 가면 용마산 정상 1.1km.

몇백 미터를 올라가 잠시 쉬었다가, 누군가 내려오는 걸 보고 그 방향으로 다시 산을 올랐다. 계곡길로 가야 하지 않냐고 했지만 그 사람이 내려온 길로 가자고 우겼다. 그리고 바위를 탔다. 가파른 흙길을 올랐다. 지도 속 화살표는 용마산 정상이 아니라 아차산 정상으로 향했다. 별로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올라온 바위를 다시 내려가는 게 무서웠다. 정상경로가 맞나? 아무런 안내표지도 없고,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지만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없었다.


친구는 올라가면 아차산 정상이 나올 거 같다고 했다. 나는 잘못 미끄러지면 낭떠러지라고, 올라가도 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그냥 여기서 내려가자고 했다. 산에 왔으면 정상을 밟고 가야 한다고 내가 우겨서 올라온 길이었다. 새해 첫날 800미터 고담봉도 올랐기에 348미터 용마봉은 가뿐할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길이,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는 그 길이, 끝을 알 수 없는 그 길이 내 발걸음을 되돌렸다.

내려오는 길은 잠깐 험난했다. 우리가 탔던 바위는 걸어내려 가기엔 너무 가팔라, 아까 봤던 사람이 내려왔던 또 다른 바윗길을 거의 주저앉아서 엉금엉금 내려왔다. 내 앞에 친구가 안전히 길을 터줬다. 그래도 난 죽는 줄 알았다. 내가 이토록 죽기 싫어하는 인간인지 이번에 매우 절실히 느꼈다. 산 중턱에서부터 다시 신나게 하산했다. 그리고 또 길을 잘못 들어 올라왔던 지점이 아니라 긴고랑길의 시작 지점, 아차산 유아숲체험원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걸었다. 바윗길을 내려올 때 너무 긴장했는지 무릎이 욱신거렸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뻗어버리거나 주저앉을 상황은 아니었다. 멍하니 서서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여긴 지상이니까, 더 이상 낭떠러지는 없으니까, 편안한 마음이었다.


등산 진입로 즉 우리의 출구 옆, 등산 안내 지도를 찍어왔다. 집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상경로를 가지 않은 게 맞는 거 같다. 입구에서 한 아저씨에게 여쭤봤을 때 좌측으로 가면 된다고 했는데, 너무 빨리 좌측으로 빠졌던듯하다. 긴고랑길을 다 올라 만나는 아차산 정상길에서 좌측으로 향하면 용마산 4보루가 나온다. 거기서 더 직진하면 용마산 3보루. 348.5미터 정상이다. 지도상 우리는 긴고랑길 2/3 지점 즈음에서 좌측으로 빠져 산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거기서도 표지판을 하나 본 것 같긴 한데, 등찔이들을 위한 길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고구려정길을 포기한 탓이다. 둘레길을 걷고, 긴고랑길을 타며 통곡의 바위를 마주한 다이내믹한 산행이었지만 정상에 대한 아쉬움은 이렇게 남는다. 친구는 이 또한 즐겁지 않냐고 했다. 절벽(같지도 않은 절벽) 앞에서 무섭다고 움찔거리던 나와 달리 이 길로 올라가면 정상으로 갈 수 있을 거 같다던 사람, 다수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갔던 길이니 길은 있을 거라며 가보자고 했던 용감쟁이 덕분에 일상 복귀 둘째 날 생산적인 하루를 보냈다.


길을 가고 가다 보면 그 길의 끝이 나오는데, 산도 오르고 오르다 보면 그 산의 정상을 마주할 수 있는 걸까?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단순 확률은 반반, 하지만 모르는 길을 간다는 건 그 이상의 용기와 도전, 결과에 대한 감내 의지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내 인생도 끝이 혹은 정상이, 뭐 다르게 말하면 정답이 있는 것도 같은데 나는 능선만 내도록 맴돌고 있는 느낌이다. 능선을 타는 것도 재밌고,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서 마주하는 어려움도, 돌아 나오는 것도 경험이고 의미지만 정상을 찍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무감 같다. 난 남들이 다가는 길을 안정적으로 가고 싶었고,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뻔해도 그저 그 길이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은 매우 자주 찾아왔다. 가지 않은 그 길의 끝이 내가 간 길보다 더 좋았다는 걸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길을 선택할 자신은 없다. 그때는 그때 나름의 고민과 기준이 있었을 테니, 후회는 내가 간 길을 나 스스로 잘 닦지 못했다는 것에서 비로소 태어나는 게 아닐까.


지금 난 내가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잘 모른다. 정상경로인지, 옆으로 빠진 건지 (객관적으로 보자면 옆으로 빠진 게 분명한데 그 무엇도 지금은) 확신하고 싶지 않다.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오늘의 난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 그저 오늘의 나를 잘 살아내며 내일의 내가 멋진 끝을 또 다른 신나는 시작을 마주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번에는 제대로 정상에 올라야지, 아차산과 용마산을 가야 할 이유가 아직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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