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내내 Nov 24. 2023

비건샴푸가 주는 면죄부

워킹맘의 있어빌리티를 위하여

인스타 화면의 정사각형 속 예쁜 사진과 설명을 들으면 저건 꼭 우리 집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인스타 알고리즘은 내 마음에 도청장치를 달아놨는지 어쩜 내가 필요한 것만 딱 집어주는지. 혹자는 인스타 팔이피플들의 물건을 사는 건 시녀들이 하는 짓이라고 힐난하지만, 나는 그들이 제공하는 스토리를 사는 거라고 변명해 본다.


내가 주로 구매하는 제품들은 회사의 스토리나 미션이 "비건"이나 “동물실험반대”와 연관된 제품들이 많다. 어느 날 비건 샴푸를 1+1으로 사서 정리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물어본다.

비건도 아니면서 비건샴푸는 왜 써?


사실, 비건샴푸는 어떻게 써도 불편하다. 아무리 씻어도 빡빡한 느낌에 컨디셔너로 한번 더 헹궈야 출근은 할 수 있는 머릿결이 나올 것 같다. 드라이를 하면 샴푸향은 다 날아갈 정도로 향의 지속력도 짧다. 하지만, 불편함 뒤에 있는 동물 실험 반대라는 회사 스토리는 나에게 면죄부를 만들어 준다. 어제 여러 번 빨아 쓰는 행주 대신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은 죄를 비건 샴푸로 머리를 감으면서 씻겨보낸다.



학부생 시절, 환경과 관련한 교양 수업을 들었다. 과도한 육식 소비량에 소와 돼지등을 키우는 농가가 증가하고, 이는 수질오염과 공기오염으로 직결된다는 내용이었다. 교수님은 '이번주만이라도 고기를 줄여보자'라는 일주일 챌린지를 제안하셨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채식을 했었다.


채식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

-락토: 고기, 생선, 가금류, 계란이 들어간 모든 음식은 섭취하지 않지만, 유제품은 먹는 채식주의자
-오보: 고기, 생선, 가금류가 들어간 모든 음식은 먹지 않지만, 계란은 먹는 채식 주의자
-락토&오보: 고기, 가금류, 생선은 먹지 않지만, 유제품과 계란은 먹는 채식 주의자
-패스카타리 안: 고기, 가금류, 유제품, 계란은 먹지 않지만, 생선은 먹는 채식주의자
-비건: 고기, 가금류, 생선, 계란, 유제품이 들어간 모든 음식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출처: 마요 클리닉)


이 중에서도 가장 쉬운 채식 단계인 락토-오보식단을 3년 동안 유지했다. 미국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베지터리안 레스토랑도 많았고 어느 레스토랑에 가도 베지터리안용 메뉴가 항상 있었으니깐. 사실, 밥 대신 라테로 저녁을 때우기도 하던 바쁜 20대 유학생에겐 베지테리안이란 사실이 오히려 있어빌리티를 만들어줬다.

즐겨 먹던 도미노 피자의 Mushroom and Jalapeno Pizza. (출처: 도미노피자 홈페이지)


반면 한국은 어딜 가나 고기가 있었다. 백반집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는 영락없이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베지터리안들이 주로 먹는 순두부찌개에도 고기가 들어간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매번 치킨집에서 모였는데, 뻥튀기랑 치킨무만 먹었던 슬픈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된다.

해내내, 한국 왔을 때
치킨집에서 치킨 무만 먹었던 거 기억나냐?


어느 추운 겨울, 오전 운동을 끝내고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냉면집을 갔다. 냉면은 당연히 고기가 아니니깐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운 날이라 그랬을까? 따뜻한 국물을 내주길래 면수인 줄 알고 너무 맛있게 마셨는데, 그게 고기육수란다. 그렇게 추웠던 겨울, 3년간의 채식은 육수 한 컵에 막을 내렸다. 3년 동안의 채식이 환경보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길.



24시간이 바쁜 워킹맘이 환경보호를 실천하기 가장 쉬는 방법은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살림 유튜버들이 쓰는 다회용 실리콘백은 결국 냉장고 냄새가 배겨서 못쓰겠다. 고기를 소분해서 정사각형 유리통에 담았는데, 냉동실에는 '정사각형' 유리통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결국 일회용 투병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고 구석에 구깃구깃 넣었다. 아무리 퐁퐁으로 박박 문질러 씻어도 냄새가 나는 행주 때문에 결국 물티슈를 쓴다.


육아도 커리어도 못 잡는단 죄책감을 달고 사는 워킹맘과 부유하게 사교육비는 다 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워킹맘 그 경계선 사이. 그 얇은 경계선 사이에서 친환경이나 동물권보호 같은 면죄부는 떨어진 자존감과 있어빌리티를 끌어올린다. 면죄부가 붙은 제품의 가격은 일반 제품가보단 비싸지만, 나의 양심을 위해 그깟 몇 천 원짜리 면죄부 하나 못 살까.


오늘도 나는 비건 샴푸로 머리를 감고, 동물 테스트를 안 했다는 무기자차 선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 출근준비를 한다. 가방에는 깨끗하게 씻은 텀블러 하나를 넣고서.


있어빌리티: '있어 보인다’는 표현과 능력이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ability’를 합쳐 만든 신조어로 실상은 별 거 없지만 뭔가 있어 보이게 자신을 잘 포장하는 하는 능력을 뜻한다. (네이버 사전)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에도 다시 프리퀀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